“그림은 보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감상자로부터 찾았다. 감상자가 그림의 도착점일 뿐 아니라 출발점이자 근원이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피카소 작품은 오늘날에도 그 뛰어난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다. ‘아비뇽의 여인들’부터 ‘게르니카’까지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사그라들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피카소 열풍이 뜨겁다. 지난 5월 1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은 코로나19 확산에도 역대급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다. 관람을 위해 2시간 넘게 기다렸다는 온라인 후기가 잇달아 올라오고 있다. 전시업계에 따르면 누적 관람객 수가 1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시가 다음달 29일까지이므로 20만 명은 가뿐히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람들은 왜 피카소에 열광할까. 피카소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무한한 상상력의 우주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는 원근법과 명암법 등 기존 회화 법칙을 모조리 해체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법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자신이 만든 양식을 반복적으로 무너뜨리며 혁신을 이어갔다. 이 때문에 그는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스티브 잡스 등 기업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도 꼽힌다.
“루브르 미술관보다 선생님을 먼저 찾아왔습니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는 젊은 시절 피카소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피카소는 답했다. “틀리지 않은 선택이다.” 루브르에서도 미처 경험할 수 없을 만큼 새로운 세계와 패러다임을 만들어낸 피카소. 그의 삶과 작품에 또 한 번 빠져들 시간이다.
포털사이트 질문 코너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질문이다.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성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대중의 눈에 비친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은 ‘이상한 그림’이다. 눈·코·입이 엉뚱한 곳에 붙어 있는 얼굴, 신체 비례를 벗어나 뒤틀린 몸, 전통적인 구도와 원근법을 완전히 무시한 화면 구성….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르네상스 거장들은 물론 한 세대 위 화가인 고흐, 고갱과 비교해도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에서 아름다움을 직관적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피카소는 10대 때부터 이미 대가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천부적인 묘사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구상화를 못 그린 게 아니라 안 그렸다는 얘기다. 한 화가가 자신의 극사실주의 그림을 들고 와 “당신의 그림은 마구잡이”라고 힐난하자 피카소가 몇 분 만에 똑같은 그림을 그려내 응수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위대함은 ‘돈 되는 그림’을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었는데도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 현대미술의 바탕을 만들어낸 데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 걸린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의 천재성을 체감할 수 있는 감상법을 소개한다.
끊임없는 도전, 입체주의에 이르다
피카소의 작품은 한 화가가 그렸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시기별로 극명하게 다르다. 당시 미술 사조와 피카소가 처한 상황 등을 알면 작품을 더 재미있게 감상하고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출품작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피카소가 20세 때 그리기 시작한 ‘파라렐로의 콘서트 카페’(1900~1901)다. 당시 약관의 청년이었던 피카소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찾기 위해 여러 시도를 거듭하고 있었다. 무용수보다 관객을 강조하고 좌우 화면 끝 인물을 과감하게 잘라낸 이 그림에서는 새로운 구성에 대한 탐구를 엿볼 수 있다.
1907년 피카소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시작으로 입체주의 시대를 열었다. 전시에 나온 ‘만돌린을 든 남자’(1911)는 대상을 기하학적 요소로 분할하고 해체하는 분석적 입체주의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그림에서는 만돌린과 남자의 형체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입체주의가 심화되면서 추상주의와 분간이 어려워지자 피카소는 좀 더 알아보기 쉬운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는다. 구상성을 가미한 종합적 입체주의 작품인 ‘콧수염이 있는 남자’(1914)가 그 결과물이다.
입체주의는 피카소가 예술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입체주의 그림은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 미술계 최대 발명으로 꼽히는 원근법을 깡그리 무시했다. 당시 미술가들에게 경전과도 같았던 기존의 틀을 깨부수면서 근대 서양미술의 주요 사조인 모더니즘이 시작됐다.
사회참여 도구가 된 미술…말년까지 도전 거듭
피카소는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은 입체주의 그림을 통해 또다시 미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다. 그가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담은 ‘게르니카’(1937년)를 그리기 전까지만 해도 미술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식품 역할에 그쳤다. 하지만 피카소의 반전 예술로 인해 미술은 사회 참여의 도구로 한 단계 도약했다는 평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반전 예술 중 ‘한국에서의 학살’(1951)을 감상할 수 있다. 국내에서 처음 전시되는 이 작품은 ‘게르니카’, 제2차 세계대전을 그린 ‘시체 구덩이’(1944~1946년)와 더불어 피카소의 반전 예술 3대 걸작으로 꼽힌다.
피카소는 매체도 가리지 않았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는 동판에 에칭 기법으로 그림을 새겼고, 1946년부터는 도예 작업을 시작해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수천 점의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두 팔을 벌린 여인’은 1957~1965년 사이에 철판을 절단하고 구부려 만든 조각들 중 하나다. 피카소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창작혼을 불태웠던 증거로 남아 있다.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을 기획한 서순주 전시총감독(58·사진)은 자신있게 말했다. 최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자리에서다. 그는 국내에서 ‘블록버스터급 명화 전시’를 처음으로 시작한 기획자다. 샤갈전(2004년)을 비롯해 모네전(2007년), 반 고흐전(2007~2008년), 르누아르전(2009년), 로댕전(2010년), 밀레전·모딜리아니전(2015년) 등 한국 전시 역사에서 손꼽히는 굵직한 전시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3년 전부터 피카소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을 비롯해 미국과 스페인 등 여러 곳에서 작품을 들여와 피카소의 반전 예술을 조망하려고 했죠.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로 프랑스의 국립 피카소미술관 한 곳에서만 작품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죠.”
계획은 무너졌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오히려 전시에 전화위복이 됐다. 피카소미술관의 작품을 오래전부터 빌려가기로 했던 다른 미술관들이 봉쇄 조치 때문에 전시를 취소하면서 예정보다 많은 작품을 들여올 수 있게 된 것. 이번 전시에는 피카소의 회화 34점이 걸렸다. 피카소미술관이 보유한 300여 점의 회화 중 10% 이상이 외부 전시에 나온 건 이례적이다.
이번 전시가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유로 서 감독은 ‘원화의 감동’을 꼽았다.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입소문을 낸 덕분에 관객들이 기대보다 많이 찾아주셨습니다. 원화만이 줄 수 있는 진정한 감동을 더 많은 관객이 느꼈으면 합니다.”
이 회장뿐만 아니다. 전 세계의 많은 기업인이 피카소와 그의 작품을 사랑한다. 미국의 대형 헤지펀드인 SAC캐피털 어드바이저스 회장이자 뉴욕 메츠 구단주인 스티브 코헨은 2013년 피카소의 작품 ‘꿈’을 1억5500만달러(약 1757억원)에 구매해 화제가 됐다.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임직원 앞에서 피카소의 말을 자주 인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 세상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접하고 융합해 위대한 제품을 창조하라는 의미다. 피카소의 뛰어난 창조성과 상상력은 오늘날까지 많은 기업인에게 혁신의 방향과 길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발견한다”…직관과 조합의 힘
스페인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미술 교사이자 미술관 큐레이터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12세 되던 해, 붓을 놓기로 결심했다. 자신을 능가하는 아들의 실력에 감탄하며 그의 교육에만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뛰어난 실력에도 자만하지 않고 평생 어린아이의 시선을 간직하려 노력했다. 피카소는 “모든 아이는 예술가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 직관은 인위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고 꾸미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는 평소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한다”고 강조했다. ‘황소머리’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로 만들어졌다. 그는 그저 고물상에서 고물 자전거를 보며, 평소 즐겨 보던 투우 경기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자전거와 소, 기존의 평범한 두 요소를 연결해 조합하고 보니 색다른 결과물이 탄생하게 됐다.
자신의 화풍도 해체하는 혁신의 길
경영학에서 흔히 말하는 ‘파괴적 혁신’도 피카소가 앞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창조의 모든 행위는 파괴에서 비롯된다”며 가까스로 만들어낸 자신만의 화풍을 과감히 바꿨다. 그래서 피카소 작품들은 하층민의 삶을 초록과 검푸른 색으로 그린 ‘청색 시대’, 곡예사와 광대 등을 분홍빛으로 그린 ‘장밋빛 시대’, 아프리카 미술에 빠진 ‘흑색 시대’로 나뉜다. 그리고 마침내 원근법, 명암법까지 무너뜨리고 ‘입체주의 시대’의 문을 열었다.
92세에 생을 마감한 피카소는 죽기 12시간 전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는 평생에 걸쳐 5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기업인들이 사랑하는 피카소의 모습엔 예술가로서, 또 인간으로서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이 불굴의 투지까지 포함된 것이 아닐까.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서 아름다운 여인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야르)는 이렇게 투정을 부린다.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파블로 피카소. 영화에서 아드리아나는 피카소의 연인으로 나온다.
아드리아나는 가상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 속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피카소는 실제로 7명의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그 충만한 감정을 화폭에도 담았다. 연인을 모델로 삼아 초상화를 다수 남겼다. 연인이 바뀔 때마다 화풍이 조금씩 바뀌기도 했다.
피카소의 첫 번째 연인은 유부녀 페르낭드 올리비에였다. 피카소는 올리비에를 만난 후 어두운 색채에서 벗어나 밝은 ‘장밋빛 시대’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은 8년 동안 동거했지만 피카소가 유명해지면서 헤어졌다. 두 번째 여인은 올리비에의 친구였던 마르셀 윙베르. 그는 피카소 지인의 연인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깊은 사랑에 빠졌다. 피카소는 훗날 “가장 만족했던 여성은 윙베르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피카소는 결핵에 걸린 그를 돌보지 않고 혼자 이사를 갔고, 윙베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은 했지만 순탄치 않았다. 첫 번째 아내였던 올라 코클로바와는 17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으나 잦은 불화를 겪고 헤어졌다. 두 번째 부인은 마지막 여인이었던 프랑수아즈 질로였다. 질로는 피카소와 10년을 살고 아이도 낳았지만, 먼저 피카소를 떠나갔다.
피카소의 가장 빛나는 뮤즈였던 인물은 그가 46세 때 만난 17세의 소녀 마리 테레즈 발테르였다. 네 번째 여인이었던 그는 ‘볼라르 연작’ 등 피카소의 많은 작품에 모델로 등장했다. 피카소가 54세 되던 해 만난 26세 여성 도라 마르 역시 피카소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당시 피카소는 올라와 법적 부부 상태였고, 발테르와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와도 만나며 그의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그 주인공인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김희경/성수영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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