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법원을 대표하는 판사들이 참여하는 법관대표회의가 “법관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며 판사 증원 등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나섰다. 법관 1인당 담당하는 사건 수가 과다해 국민들이 졸속 재판을 받거나 재판 지연으로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법관 증원은 법조계의 해묵은 과제다. 하지만 실제 증원이 이뤄진다고 해도 실력 있는 법관 충원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로스쿨생 상당수가 판사 임용보다 대형 로펌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년부터 판사 임용을 위한 법조 경력 연수가 현행 5년에서 7년 이상으로 늘어나는 등 판사 임용 문턱이 높아져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국 판사보다 사건 수 1.5~2.5배 많아”
9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관대표회의는 지난 5일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정기회의를 열어 ‘법관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한 결의안’을 의결했다. 법관 부족은 한국 사법시스템의 고질적 문제다. 한국의 법관 1인당 본안 사건 수는 589건이다. 한국과 사법시스템이 비슷한 일본과 독일은 판사 1인당 담당 사건 수가 각각 353건과 210건이다. 한국이 1.5~2.5배 많다. 한 중앙지방법원 판사는 “주 52시간제가 도입돼 과로사하는 판사들은 예전보다 줄었다”며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건 서류를 집으로 가져가 일을 해야 판결 일정을 맞출 수 있다”고 푸념했다.
앞으로 검찰이 제출하는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 능력이 배제된다면 법정에서 증거 조사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법관의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국민이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관대표회의에서 결의안 발의를 맡은 김용희 울산지방법원 판사는 “과도한 사건 수로 인해 5분 재판을 하게 된다”며 “재판의 결론이 사무실에서 혼자 읽는 수사기록에 의해 좌우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로스쿨생 “1순위는 대형 로펌”
실력 있는 로스쿨생이 법관에 지원할 유인이 부족하다는 분석도 있다. 대표적 원인으로 ‘법조 일원화’가 꼽힌다. 법조 일원화는 일정 경력의 변호사 자격자 중에 법관을 선발하는 제도로, 2026년까지 법관 임용 기준을 점차 높여가고 있다. 현재 법관 임용을 위해 필요한 법조인 경력은 5년이다. 내년부터 필요 경력은 7년으로 늘어난다. 2026년부터는 법조인 경력 10년 이상인 사람만 법관으로 임용할 수 있다.
로스쿨생들도 “판사 임용을 준비하기보다는 대형 로펌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판사 임용이 후순위로 밀려난 것이다. 고려대 로스쿨을 다니는 A씨는 “로스쿨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급여 수준이 높은 대형 로펌에서 일하길 바랐다”며 “하지만 대형 로펌 입사에 실패해 재판연구원(로클럭)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법관 임용을 위한 경력 연수도 문제다. 로펌에서 10년차면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가장 활발하게 일할 시기다. 경력 10년차인 한 변호사는 “10년차가 법관을 지원할 유인이 너무 없다”며 “이미 로펌에서 기반을 잡은 법조인들이 명예만 보고 법관을 선택할 것이라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믿음”이라고 지적했다. 현직 법관들 사이에서도 “경력 기준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신유 춘천지법 영월지원 부장판사는 지난달 25일 사법정책연구원 학술대회에서 “법조 재직 연수 10년 기준은 과도하다”며 “법관 인사와 재판에 부정적 영향이 가장 적은 것은 5년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홍정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1명은 판사로 지원할 수 있는 최소 법조 경력을 5년으로 줄이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대법원 역시 법안 취지에 공감한다며 찬성 의견을 냈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