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메이저 '脫석유'…자산 160조원 팔아치운다

입력 2021-07-16 17:41   수정 2021-09-30 11:06


1400억달러(약 160조원). 엑슨모빌, 로열더치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토탈, 셰브런 등 글로벌 석유·가스회사들이 매각을 추진 중인 자산의 총액이다. 국제 유가가 최근 크게 올랐지만 이들 오일 메이저는 탄소 감축을 요구하는 투자자와 행동주의 펀드 등의 압박에 오히려 대규모 자산 매각에 나섰다. 미국 셰일업체들도 증산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다. 섣부른 투자로 생산량을 늘리는 대신 판매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반면 일부 중소 에너지 업체는 매물로 나온 석유 자산을 사들이고 있다. 에너지 전문 사모펀드를 비롯해 중동과 아시아 지역 국영기업들이 석유 자산을 매입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라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지만 앞으로 최소 20년 이상 석유 의존을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검은 황금’으로 불리는 석유를 둘러싸고 각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글로벌 석유업계가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일 메이저의 자산 매각 행렬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에너지 전문 컨설팅 회사 우드맥킨지의 데이터를 인용해 현재 매물로 나온 글로벌 석유기업의 자산이 총 1400억달러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미국 엑슨모빌과 셰브런, 영국 BP, 프랑스 토탈, 네덜란드 로열더치셸, 이탈리아 ENI 등은 2018년 이후 281억달러어치 자산을 처분했다. 이들 6개 회사는 300억달러가 넘는 자산을 매각 중이다. 셰브런은 미국 남서부에 있는 퍼미안분지의 유전(매장 가치 10억달러)을 매물로 내놨다.

오일 메이저들은 국제 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이상으로 오른 지금을 자산 매각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친환경 시대 전환을 위한 투자금을 마련하려고 자산을 팔아치우는 석유회사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에너지 수요 증가로 유가가 오르자 역으로 서둘러 자산 팔기에 나서고 있다는 관측이다.

글로벌 석유기업들은 ‘탄소중립’ 경영을 압박하는 투자자와 자산운용사 등도 크게 의식하고 있다. 탄소중립은 온난화를 유발하는 탄소를 배출한 양만큼 신재생에너지 발전 등을 통해 탄소를 감축·흡수하는 활동을 벌여 실질적 탄소배출량을 ‘제로(0)’로 만드는 것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과 뱅가드, UBS, 피델리티 등 ‘기후변화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이들 금융회사는 화석연료 관련 기업들에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로열더치셸 BP 토탈 등이 자산 규모를 줄이는 동시에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강조하는 배경이다. 버나드 루니 BP 최고경영자(CEO)는 “2030년까지 원유 생산을 40% 감축하고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대폭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행동주의 펀드의 맹공
지난 5월 말에는 엑슨모빌 주주총회에서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다. 지분율 0.02%에 불과한 행동주의 헤지펀드 엔진넘버원이 추천한 인사 3명이 이사로 선출된 것이다. 자산 2억4000만달러에 불과한 소규모 펀드인 엔진넘버원이 엑슨모빌 전체 이사회 의석 12석 중 25%를 차지했다.

엔진넘버원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손을 들어준 덕분이다. 엑슨모빌의 주요 주주인 뱅가드(지분율 7.8%) 블랙록(4.8%) SSGA(5.8%) 등이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기후변화에 대응해 친환경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엔진넘버원의 주장이 투자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결과다.

오일 메이저를 향한 각국 정부의 압박도 거세다. 네덜란드 헤이그 법원은 5월 로열더치셸에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19년 대비 45% 줄이라는 내용의 판결을 내렸다. 사법부가 민간 기업에 내린 사상 첫 탄소배출량 감축 명령이었다. 헤이그 법원은 지구의벗 등 환경단체 7곳이 네덜란드인 1만7200명을 대표해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측 손을 들어줬다.

CNBC방송은 “판결은 당초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 줄이겠다는 로열더치셸의 자체 계획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라며 “세계 최대 탄소배출 기업들이 파리협정에 부합하는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이뤄진 판결”이라고 전했다.
자산 인수하는 역발상 기업들
오일 메이저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압박에 석유·가스 사업 비중을 줄이고, 풍력 태양광 수소 등 친환경에너지로 속속 전환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석유 자원 투자를 늘리는 기업도 나오고 있다.

영국 이네오스에너지는 3월 미국 에너지 회사 헤스코퍼레이션이 보유한 덴마크 석유·가스 자산을 1억5000만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브라이언 길버리 이네오스에너지 회장은 “우리는 석유 자산 인수에 관심이 많다”며 “앞으로 자산 인수 규모를 15억~20억달러로 키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노르웨이 에너지 전문 사모펀드 히텍비전은 올해 엑슨모빌의 영국 석유 자산을 10억달러에 사들였다. 필리핀 우데나그룹은 로열더치셸의 연안 가스전 지분을 4억6000만달러에 인수했다. 태국의 국영 에너지 회사 PTT는 2월 BP의 오만 가스전 지분 20%를 26억달러에 매입했다.

중동 산유국들은 최근 국제 유가 상승에 증산 논의를 벌이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으로 구성된 OPEC+는 곧 회의를 열어 증산량을 결정할 방침이다. 산유량 조정과 관련해 이견을 보이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가 타협점을 찾으면서 증산 논의가 다시 속도를 낼 전망이다.

OPEC+는 지난해 5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수요 감소에 대응해 당시 세계 생산량 대비 10% 수준인 하루 1000만 배럴 감산을 결정했다. 이후 내년 4월까지 점진적으로 감산 규모를 줄여나가기로 합의했다. 현재 OPEC+의 감산 규모는 하루 580만 배럴 수준이다.

에너지업계 전문가들은 친환경 자원 개발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석유·가스 생산 분야 투자가 전반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고 있다. 제이슨 보도프 미국 컬럼비아대 에너지정책센터장은 “석유와 가스 자산 매각을 통해 청정에너지 기술 투자를 늘릴 수 있을 것”이라며 “다만 당분간 글로벌 원유 수요가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면 업계의 탄소배출 감축 노력이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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