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사장 자리요? 현금으로 주세요"

입력 2021-07-18 17:38   수정 2021-07-19 01:44

“현금으로 수백억원 받을래? 아니면 수십억원 덜 받는 대신 포장재(또는 세탁 서비스) 기업 주식과 사장 자리 받을래?”

기업 창업자의 자녀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지면 어떤 답이 돌아올까. 당연히 ‘사장’ 타이틀을 원할 듯하지만 요즘 인수합병(M&A) 시장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최근 한 달 남짓 사이에 쉰 살 넘게 먹은 대표 장수기업 두 곳이 사모펀드(PEF)에 팔렸다. 하나는 51년 된 국내 가구 1위 한샘이다. 이 회사는 총수 일가가 경영을 계속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창업자인 조창걸 명예회장은 80세를 넘겼지만 슬하의 3녀는 물론 사위들도 경영에 뜻이 없었다.
50년 넘은 기업 잇따라 매각
이보다 한 달쯤 앞서 57년 된 남양유업도 PEF에 매각됐다. 이 회사는 지난 몇 년간 ‘갑질’과 소비자 기만 등으로 ‘오명’을 켜켜이 쌓아왔다. 표면상으로는 회사가 벼랑 끝 위기에 몰리자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 총수 일가가 두 손을 든 모양새다. 하지만 속내는 조금 다르다. 이 회사는 2~3년 전부터 매각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 홍원식 전 회장이 20년 가까이 50% 넘는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상무와 본부장을 맡은 아들들의 지분율은 줄곧 0%였다. 회사를 둘러싼 논란과 상관없이 일찌감치 기업 승계를 포기한 것이다.

이들 기업 말고도 올해 장수기업들의 매각 사례가 유난히 많다. 29년 된 국내 세탁업계 1위 크린토피아도 총수 일가가 지분 100%를 내놨다. 속옷 제조업체 BYC의 총수 일가가 보유한 승명실업 역시 팔렸다. 이 회사는 BYC에 들어가는 포장재를 제조한다. 마찬가지로 매각 원인은 기업 승계에 차질을 빚어서다. 요즘 이런 장수기업 M&A 시장은 말 그대로 불이 붙었다.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현금 ‘따박따박’ 나오는 회사들을 물려주기 어렵다니. 하지만 조금 들여다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주식 대신 현금을 물려주면 증여세만 수십억~수백억원을 아낄 수 있다. 이들 기업은 대부분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판 회사다. 그렇다 보니 지분율이 대부분 50%를 훌쩍 넘는다. 증여하면 최고 50%의 세율이 붙고 최대주주는 20%가 할증된다. 남양유업의 경우 주식으로 물려줬다면 단순 계산해도 200억원 넘는 세금을 더 내야 했다.
가구 1위·세탁 1위도 승계 못해
물론 일련의 매각 사례를 단순히 세금 부담 때문이라고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문제는 자식들에게 이 회사의 사장 자리가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걸어볼 만큼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요즘 잘나가는 정보기술(IT) 분야 스타트업이나 플랫폼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뭔가 폼이 난다. 심지어 투자금도 몰린다. 이들은 한 번 터지면 조(兆) 단위 거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수십 년 된 한 우물 기업은 그런 기대도 없이 소위 기름때 묻혀가며 박 터지는 경쟁을 해야 한다. 인건비 부담과 각종 규제도 가중된다. 이럴 때 손을 내민 곳들이 PEF였다. 깔끔하게 현금 결제하고 웃돈(경영권 프리미엄)까지 쳐준다. 창업 2·3세들에겐 거부할 이유가 없다. PEF들이 이런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사재기를 하고 있다.

국내 가구 1위, 세탁 서비스 1위가 이럴진대 지방 중소기업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나마 기업 규모가 크고 우량해서 PEF가 손을 내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회사는 여유가 될 때 자산과 부동산을 팔고 사업 부문을 잘라 넘겨야 한다. “회사는 됐고 스크린골프 매장이나 차려달라는 아들 때문에 미치겠다”는 한 공구업체 사장의 고민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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