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의 최대 마케팅 장(場)인 올림픽 열기가 이번 도쿄올림픽에선 시들한 가운데, 후원사로 참여하는 삼성이 속앓이 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대회의 96%가 무관중으로 열려 마케팅 효과가 제한적인 데다 최근 반일 여론 등으로 괜히 불똥이 튈 수 있어서다. 일본 기업들마저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마케팅에서 발을 빼고 있는 상황도 삼성에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2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국내 유일의 '월드와이드 올림픽 파트너(WOP)'인 삼성전자는 이번 올림픽에서 대대적 마케팅 대신 기본적 후원만 하기로 했다. 삼성전자는 과거 공식 스폰서로서 올림픽에 3000억~4000억원가량을 쏟아붓는 대규모 마케팅을 펼쳤지만 이번에는 후원사 역할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23일 오후 8시 열리는 도쿄올림픽 개막식에도 현지법인 실무자만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이번 올림픽을 일본 시장 공략의 분기점으로 보고 지난해부터 공을 들여왔다.
삼성전자는 일본 스마트폰 시장에서 불과 한 자릿수 점유율을 기록 중이고 TV 시장에선 아예 철수한 상태다. 일본 정부가 도쿄올림픽에 맞춰 5세대 통신(5G) 서비스를 본격 상용화할 것으로 알려져 5G 통신장비를 공급하려는 삼성전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해 일본 최대 통신사인 NTT도코모와 KDDI 본사를 잇따라 방문해 경영진을 만나는 등 이번 올림픽을 착실히 준비했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올림픽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봤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은 핸드폰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이 일본 기업의 제품보다 우수함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2016년 리우 올림픽은 삼성전자가 남미시장에서 TV와 스마트폰 점유율을 크게 끌어올리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인터브랜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2000년 52억달러에서 지난해 623억달러로 20년 만에 약 12배 뛰었다. 스마트폰과 TV 등에서 기술혁신을 이룬 것과 동시에 올림픽을 활용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린 결과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올림픽에 애착이 깊었다. 특히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이 회장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IOC 위원 자격으로 올림픽이 열리기 10년 전인 2009년부터 평창 올림픽 유치에 나선 이 회장은 1년 반 동안 170여 일간 해외 출장을 다니며 IOC 위원들을 만났다. 이 기간 이 회장이 전 세계를 누빈 거리만 지구 다섯 바퀴가 넘는다. 미팅 약속을 했던 IOC 위원이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했을 때 1시간30분을 기다려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순간 눈물을 흘린 이 회장은 "이건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이 만든 것이다. 저는 조그만 부분만 담당했을 뿐이다"이라고 말했었다.
삼성이 2014년부터 테니스단(삼성증권)과 럭비단(삼성중공업)을 해체하고, 축구단 운영규모를 줄이는 등 스포츠 마케팅 비용을 축소하는 상황에서도 올림픽 WOP로 계속 참여하는 건 이 회장의 이 같은 뜻을 이 부회장이 이어가고 있다는 게 재계 설명이다. 삼성전자는 이번 도쿄올림픽 무선통신분야 공식 파트너로서 올림픽과 패럴림픽 선수단 전원에게 '갤럭시S21 5G 도쿄 2020 올림픽 에디션' 1만7000대를 지급했다. 또 '삼성 갤럭시 도쿄 2020 미디어 센터'와 메타버스 플랫폼인 네이버 제페토를 통해 '삼성 갤럭시하우스'도 개설했다. 비대면 플랫폼을 통해 기술을 알리겠다는 계획이다.
전날 니혼게이자이에 따르면 이번 대회 일본 최대 후원사인 도요타는 개막식 불참을 선언했다. 도요타는 2015년 IOC와 10년 후원 계약에 무려 16억달러(약 1조8000억원)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도요타는 이번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올림픽과 관련된 TV 광고를 내보내지 않기로 했다. 당초 제품 등을 직접 홍보하기보다는 올림픽 정신 등을 전하는 광고를 계획했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나가타 준 토요타 홍보임원은 기자회견에서 "여러가지 면에서 이해가 안 되는 올림픽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IOC가 보여준 고압적인 태도와 일본 올림픽조직위원회의 코로나19 대처 부족이 이유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WOP인 일본 파나소닉도 경영진의 개막식 불참은 물론 이번 대회 기간 광고 활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일본 내에서도 올림픽 개최 반대여론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의 활발한 마케팅 활동이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다. NTT도코모와 NEC 경영진 또한 개막식 불참을 선언했고, 일본항공 경영진 역시 불참하는 쪽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사히맥주도 일본 올림픽에 오프라인 마케팅을 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WOP가 아닌 일본 기업들이 이번 올림픽 후원에 약 30억달러(3조4600억원)를 지불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국내에서 일고 있는 반일 감정도 우려되는 대목이다. 도쿄올림픽 조직위가 독도를 일본 땅처럼 표시하고 군국주의 상징인 욱일기를 이용한 응원을 허용하면서 가뜩이나 국내에서 차가워진 도쿄올림픽에 대한 여론을 더 얼어붙게 했다. 지난 17일에는 욱일기 사용에 대응해 우리 선수들이 선수촌에 걸었던 '이순신 현수막'을 강제 철거시키면서 부정적 여론이 한층 커졌다. 올림픽 개막 한 주 전 소마 히로히사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망언한 것도 올림픽을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을 추진했던 양국에 악재로 작용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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