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후기 쿠리우스 송사(訟事)는 로마시대 유언의 해석과 관련해 중요한 분기가 되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사건의 발단은 코페니우스라는 이름의 한 가장이 막대한 토지를 물려줄 상속인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을 지목하면서 불거졌다. 코페니우스는 생전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을 상속인으로 지정하지만 만약 그 아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한다면 마니우스 쿠리우스가 대신 상속인이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을 작성할 당시 코페니우스가 결혼했었는지 여부는 미스터리지만 아무튼 코페니우스는 자신이 아들을 보고 난 뒤에야 죽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는 상속인으로 지정된 아들이 아예 출생하지 않으면서 복잡해졌다. 당시 로마법 처리 관례대로 유언자의 발언 자구 하나하나에 충실한 유언문구를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과 유언자의 의사와 의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견해가 팽팽하게 맞섰다. 유언장의 자구 하나하나에 충실한 입장에선 코페니우스가 남긴 유언에서 쿠리우스는 “미성숙한 자를 위한 보충상속인으로서만 지정됐다”며 아들이 아예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선 보충상속인의 자격도 원천적으로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쿠리우스의 변호인들은 “지나치게 지엽적으로 자구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피상속인이 의도한 바에 따라 효과를 부여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아들의 출생 여부와는 무관하게, 어쨌거나 아들이 상속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 만큼 쿠리우스에게 상속시키는 것이 피상속인의 진정한 의사에 부합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당대의 유명 인사와 거물들이 양측의 변호인으로 총동원돼 격돌한 이 사안은 로마공화정 후기의 상설 재판기관인 백인심판소까지 가게 됐다. 결국 백인심판소는 쿠리우스 변호인들의 감정적 호소에 마음이 기울었고 쿠리우스가 상속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언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판결은 이후 수세기 동안 정착되지 못하는 등 진통을 겪었지만 법학자들은 쿠리우스 송사를 ‘의사(The spirit)주의’가 ‘문언(The letter)주의’에 승리한 사건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모든 유언이 재산 상속과 이래저래 연관된 것이었다. 특히 동형유언은 유언자가 5명의 증인과 동으로 만든 저울을 가진 자 앞에서 유산을 신탁받은 사람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이전하고, 자신이 죽은 뒤 누구에게 재산을 귀속시킬지를 정하는 것 같은 복잡한 요식행위를 필요로 했다. 이 과정에서 상속인을 지정하는 것이 유언의 ‘머리이자 기초’가 됐다. 심지어 유언으로 “자유인이자 상속인이 되어라”라는 지정문언을 남기면 노예를 상속인으로 삼을 수도 있었고, 유언으로 자기 자식을 노예로 팔아 넘기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이 같은 여러 판례를 통해 상속인이 지정되지 않은 유언은 유언으로 효력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됐다.
상속은 대를 이어 경제적 부를 유지하고 확대시켜 나가는 데 필수적인 기반이다. 상속제도에 따라 한 사회의 부의 이전과 확산 모습은 큰 차이를 보였다. 고대 로마인들은 재산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도 인간의 아름다움과 자연에 대한 인간 우월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 재산과 가족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로마법상 가족을 지칭하는 ‘파밀리아(familia)’라는 단어는 그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의미가 재산이었다. 또 로마법상의 허다한 판례를 살펴봐도 가족의 재산은 원로원 결정이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계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이런 배경 아래 치밀한 법 논리를 통해 로마인들은 재산을 보전하는 자신만의 상속 제도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② 우리나라 민법에서도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유언은 효력이 없다고 규정하는데, 유언에 엄격한 요건을 규정하는 이유는 뭘까.
③ 나라면 재산을 자녀에게 상속하는 것과 상속 대신 사회에 환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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