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민케인'의 감독이자 주연배우로 유명한 오슨 웰스는 1938년 허버트 조지 웰스의 미래주의 소설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을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해 방송했다. 화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뉴저지를 침공했다는 내용이다. 이 방송으로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공포를 느꼈으며, 일부 사람은 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거나 피란을 떠났다.
로봇·AI 무비판적 수용
오슨 웰스의 우주전쟁 사례는 정보의 무비판적 수용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오늘날 로봇과 인공지능에 관한 논의도 이와 닮아 있다. 새로운 혁명이 바꿔 놓을 미래에 대해 거품을 물고 열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우리 모두가 끔찍한 미래를 맞을 것이라는 무비판적인 양극단의 전망이 공존한다. 이런 변화가 우리 현실에 비춰볼 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대개 명확하지 않다. ‘로봇세’에 대한 논의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전문가와 정부의 의견에 기대어 양극단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주장 자체가 아니라 그 근거다. 빌 게이츠는 창고 업무, 운전, 집안 청소 등 20년 뒤에는 기계로 대체될 것이 확실한 일자리 범주가 매우 넓다고 설명하면서 로봇세 도입을 지지한다. 반면 기술산업 분야에서는 로봇세를 ‘혁신에 대한 벌칙’이라고 명명하면서 경쟁력과 고용에 매우 부정적인 충격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로봇세를 둘러싼 논쟁
특정 이슈에 대한 입장은 주어진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좋은 제도란 주어진 환경에서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제도를 의미한다. 로봇세에 대한 의견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국가 재정 측면이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로봇은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의 노동에 대해서는 소득세뿐만 아니라 고용주와 직원이 부담하는 고용세 형태의 세금이 발생한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로봇과 인공지능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으면 결국 인간의 노동을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대체하라고 장려하는 셈이 된다. 이 경우라면 기술 발전에 따른 실업, 불평등 심화 등 많은 직간접적 사회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설령 대규모 빈곤사태까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반의 소득이 줄어들 것은 분명하다.무엇보다 로봇세 부과 여부는 로봇과 인공지능을 ‘인공적인 노동자’로 볼 것인지 일반적인 자본투자, 즉 설비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인공적인 노동자로 볼 경우 분명 사람과 똑같은 세금을 거둬야 한다. 하지만 기계 설비로 본다면 세금 부과가 어색하다. 그동안 거의 대부분 국가에서 기업이 자본투자를 할 경우 세금이 아니라 오히려 보조금을 준다. 높은 자본투자는 생산성 증가로 이어져 국가 전체의 1인당 국민소득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그 전제다. 물론 자본투자 덕분에 일자리를 잃는 사람도 생긴다. 하지만 다른 분야에서 새롭게 생겨난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 시장원리에 의해 이런 순환이 충분히 일어나지 않으면 정부가 개입해 해결하곤 했다. 세계화 양상이 심해지면서 어떤 나라가 자본설비 투자에 세금을 매긴다면 기업은 관련 활동의 일부 혹은 전부를 다른 나라로 옮겨버린다. 로봇세를 신설할 경우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사실 오늘날 로봇은 대부분 물리적인 로봇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그렇다면 인간 일자리를 위협하는 소프트웨어에도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은행원의 일자리를 파괴했던 ATM(혹은 내장된 소프트웨어)도 세금 부과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
발전단계별 가이드라인 필요
로봇세 부과는 당위성 차원이 아니라 경제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 새로운 조치에 뒤따르는 현실적 어려움들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 각 사회의 특징을 고려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해외 국가와 우리의 노동 여건 및 산업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로봇세의 영향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의사결정 단계에서 보다 종합적인 세밀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무엇보다 로봇세 부과와 관련해 아직은 찬반 어느 쪽도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시점 측면에서 다소 이른 고민일지 모른다. 로봇세 부과 여부를 결정해야 할 시점의 경제환경은 지금과 아주 다를 수 있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전방위적으로 인간의 일자리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일이 당장 내일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루하루는 금방 수십 년이 되고, 수백 년이 되겠지만, 미래의 알 수 없는 어느 시점을 대비할 목적으로 우리의 삶과 정책 틀을 완전히 새롭게 설계하는 것은 비싼 대가를 치르는 어리석은 행동일 수 있다. 양극단의 전망보다 예상 가능한 몇 년 뒤에 있을 현안들에 더 집중하는 균형감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얻는 현실 감각과 인사이트가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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