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은 계곡, 서양은 바다…피서명소 왜 다를까? [고두현의 문화살롱]

입력 2021-07-23 18:00   수정 2021-07-24 00:05

산수(山水)문화와 해양(海洋)문화의 차이일까. 동양 그림에는 산과 계곡을 담은 산수화가 많다. 무더위를 식히는 피서 풍경도 마찬가지다. 서양 그림에는 바다와 해안 풍광이 많다. 유럽 북서부 바닷가나 지중해 연안이 주요 배경이다.

무더위가 동서양을 가릴 리 없지만, 이에 조응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문화의 토양과 정서적 지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피서지도 그렇다. 동양에서는 산이나 계곡, 서양에서는 바다나 섬을 먼저 떠올린다.

한자로 ‘휴가(休暇)’는 ‘편안하게 쉴 틈’을 뜻한다. ‘쉴 휴(休)’는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편히 앉은 모습이고, ‘틈 가(暇)’는 한가한 날(日)을 빌린다()는 뜻이다. 미리 날짜를 잡아 숲에서 평화롭게 쉬는 게 곧 휴가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전통 피서지는 숲과 계곡을 품은 산이다.
'바람 빗질'에 거풍·나체 일광욕
옛사람들은 그 속에서 어떻게 더위를 식혔을까. 대표적인 피서법은 ‘탁족(濯足)’이다. 맑게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씻으며 더위를 잊는 풍습은 수백 년 전부터 내려왔다. 발은 온도에 민감해 차가운 물에 담그면 금방 온몸이 시원해진다. 물살이 발바닥을 자극하면 건강에도 좋으니 일거양득이다.


발을 씻은 다음에는 상투를 풀어 머리카락을 바람으로 빗는 ‘즐풍(櫛風)’을 즐겼다. 그늘진 숲으로 불어오는 바람 앞에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는 걸 ‘바람 빗질’이라고도 했다. 이백이 시 ‘하일산중(夏日山中·여름날 산속에서)’에서 ‘흰 깃털 부채 나른히 부치며/푸른 숲속에 벗은 채로 있네./수건 벗어 바위에 걸어두니/맨 이마를 솔바람이 씻어주네’라고 노래한 것과 닮았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장면도 종종 펼쳐졌다. 이른바 ‘거풍(擧風)’이다. 아랫도리까지 훌렁 벗고 바람 볕을 쬐다 보니 인적이 드문 곳이어야 했다. 좀 민망스럽긴 해도 요즘의 삼림욕에 나체 일광욕을 더한 특별 피서법이라 할 만하다.

그때는 피톤치드가 뭔지 몰랐겠지만,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서 항균 효과까지 덤으로 누린 셈이다. 나무가 박테리아와 해충을 막기 위해 스스로 생산하는 식물성 유기화합물인 피톤치드야말로 인체 면역력을 키우는 ‘천연 백신’ 아닌가. 감기 증세와 비슷한 코로나19 감염병 예방에도 그만이다.

이때의 옷은 통풍이 잘되는 모시나 삼베로 지어 입었다. 윗도리 안에는 땀이 차지 않게 등거리(등나무로 엮은 조끼)를 넣어 입었다. 바람을 통하게 하고 옷이 달라붙는 걸 막아주는 ‘쿨 웨어’다. 여기에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합죽선을 부치면서 찬물에 띄운 참외와 수박까지 한입에 넣으면 더할 나위 없다.

임금도 가까운 산을 찾곤 했다. 세조는 오대산 계곡과 상원사를 즐겨 찾았다. 중국 황제들 역시 산과 물이 있는 피서산장에서 여름을 보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허베이성(河北省) 청더(承德·옛 열하)의 여름 별궁이 유명하다.

로마 황제들의 피서지는 대부분 바닷가였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나폴리는 고대부터 여름 별장으로 이름났다. 소렌토 앞바다의 카프리 섬에 별장지가 아직 남아 있다. 아름다운 아말피 해안 또한 피서 명소로 꼽힌다.
250년 전 영국에 최초 해수욕장
유럽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바다 수영을 즐겼다. 기원전 350년에 고대 그리스 여성들이 수영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오늘날 같은 해수욕장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처음 생겼다. 산업혁명으로 경제가 활성화되고 부자들의 씀씀이가 커지면서 브라이턴과 스카버러 등 해변 휴양지가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초 노르망디의 디에프에 해수욕장이 들어섰다. 매년 여름 궁정을 옮겨올 만큼 인기였다. 중산층이 주로 이용한 트루빌 해수욕장은 클로드 모네의 그림에도 나온다.


덴마크 화가 폴 구스타프 피셔가 120여 년 전에 그린 ‘해변의 하루’에는 소녀들이 백사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동안 정장 차림의 부부가 이동식 탈의실 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당시만 해도 어른이 해수욕장에서 벌거벗는 건 금기였고, 현대식 비키니가 등장한 것은 19세기부터였다.
한국선 부산 송도에 처음 생겨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가 돼서야 해수욕장이 문을 열었다. 1913년 일본인들이 부산에 송도해수욕장을 개설한 게 최초다. 이후 인천 월미도와 원산 송도원 등에 개장되면서 해수욕이 새 피서법으로 주목받았다. 불과 100여 년 전 일이다.

서양에서 휴가를 뜻하는 ‘바캉스(vacance)’는 단순히 더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어원인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의 뜻도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비우는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어 바캉스, 영어 베케이션(vacation)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 바캉스가 공식화된 것은 1936년이다. 노동자들에게 ‘2주간의 유급 휴가’가 보장된 게 결정적인 계기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바캉스를 ‘일에서 벗어나 가족·친구와 여행하며 추억을 만들고 즐길 수 있는 기간’으로 여긴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전통 피서법은 ‘자유를 찾는 것’보다 ‘더위를 피하는 것’에 더 가깝다. 하긴 옛사람들의 표현도 더위를 피해 달아나는 피서(避暑), 더위 자체를 잊는 망서(忘暑), 더위 속으로 숨는 은서(隱署) 등 자연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무더위를 식힐 문명의 이기가 없었기에 폭염과 맞서기보다는 이를 잊는 심신수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리라. 연암이 강조한 ‘책 읽기에 착심(着心)해 더위를 이기는 법’도 훌륭한 피서법이다. 요즘은 에어컨 바람 아래 ‘도서관 북캉스’나 ‘카페 북캉스’를 즐길 수 있다. 코로나 때문에 발은 묶였지만, 동서양 피서 명소인 산과 바다의 시원함을 한곳에서 다 누릴 수 있으니 “더워서 못 살겠다”는 푸념도 잠시 내려놓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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