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동서양을 가릴 리 없지만, 이에 조응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문화의 토양과 정서적 지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인기 있는 피서지도 그렇다. 동양에서는 산이나 계곡, 서양에서는 바다나 섬을 먼저 떠올린다.
한자로 ‘휴가(休暇)’는 ‘편안하게 쉴 틈’을 뜻한다. ‘쉴 휴(休)’는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어 편히 앉은 모습이고, ‘틈 가(暇)’는 한가한 날(日)을 빌린다()는 뜻이다. 미리 날짜를 잡아 숲에서 평화롭게 쉬는 게 곧 휴가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전통 피서지는 숲과 계곡을 품은 산이다.
발을 씻은 다음에는 상투를 풀어 머리카락을 바람으로 빗는 ‘즐풍(櫛風)’을 즐겼다. 그늘진 숲으로 불어오는 바람 앞에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는 걸 ‘바람 빗질’이라고도 했다. 이백이 시 ‘하일산중(夏日山中·여름날 산속에서)’에서 ‘흰 깃털 부채 나른히 부치며/푸른 숲속에 벗은 채로 있네./수건 벗어 바위에 걸어두니/맨 이마를 솔바람이 씻어주네’라고 노래한 것과 닮았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장면도 종종 펼쳐졌다. 이른바 ‘거풍(擧風)’이다. 아랫도리까지 훌렁 벗고 바람 볕을 쬐다 보니 인적이 드문 곳이어야 했다. 좀 민망스럽긴 해도 요즘의 삼림욕에 나체 일광욕을 더한 특별 피서법이라 할 만하다.
그때는 피톤치드가 뭔지 몰랐겠지만,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면서 항균 효과까지 덤으로 누린 셈이다. 나무가 박테리아와 해충을 막기 위해 스스로 생산하는 식물성 유기화합물인 피톤치드야말로 인체 면역력을 키우는 ‘천연 백신’ 아닌가. 감기 증세와 비슷한 코로나19 감염병 예방에도 그만이다.
이때의 옷은 통풍이 잘되는 모시나 삼베로 지어 입었다. 윗도리 안에는 땀이 차지 않게 등거리(등나무로 엮은 조끼)를 넣어 입었다. 바람을 통하게 하고 옷이 달라붙는 걸 막아주는 ‘쿨 웨어’다. 여기에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합죽선을 부치면서 찬물에 띄운 참외와 수박까지 한입에 넣으면 더할 나위 없다.
임금도 가까운 산을 찾곤 했다. 세조는 오대산 계곡과 상원사를 즐겨 찾았다. 중국 황제들 역시 산과 물이 있는 피서산장에서 여름을 보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허베이성(河北省) 청더(承德·옛 열하)의 여름 별궁이 유명하다.
로마 황제들의 피서지는 대부분 바닷가였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나폴리는 고대부터 여름 별장으로 이름났다. 소렌토 앞바다의 카프리 섬에 별장지가 아직 남아 있다. 아름다운 아말피 해안 또한 피서 명소로 꼽힌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초 노르망디의 디에프에 해수욕장이 들어섰다. 매년 여름 궁정을 옮겨올 만큼 인기였다. 중산층이 주로 이용한 트루빌 해수욕장은 클로드 모네의 그림에도 나온다.
덴마크 화가 폴 구스타프 피셔가 120여 년 전에 그린 ‘해변의 하루’에는 소녀들이 백사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동안 정장 차림의 부부가 이동식 탈의실 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당시만 해도 어른이 해수욕장에서 벌거벗는 건 금기였고, 현대식 비키니가 등장한 것은 19세기부터였다.
서양에서 휴가를 뜻하는 ‘바캉스(vacance)’는 단순히 더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어원인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의 뜻도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비우는 것’이다. 이것이 프랑스어 바캉스, 영어 베케이션(vacation)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에서 바캉스가 공식화된 것은 1936년이다. 노동자들에게 ‘2주간의 유급 휴가’가 보장된 게 결정적인 계기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바캉스를 ‘일에서 벗어나 가족·친구와 여행하며 추억을 만들고 즐길 수 있는 기간’으로 여긴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전통 피서법은 ‘자유를 찾는 것’보다 ‘더위를 피하는 것’에 더 가깝다. 하긴 옛사람들의 표현도 더위를 피해 달아나는 피서(避暑), 더위 자체를 잊는 망서(忘暑), 더위 속으로 숨는 은서(隱署) 등 자연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무더위를 식힐 문명의 이기가 없었기에 폭염과 맞서기보다는 이를 잊는 심신수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리라. 연암이 강조한 ‘책 읽기에 착심(着心)해 더위를 이기는 법’도 훌륭한 피서법이다. 요즘은 에어컨 바람 아래 ‘도서관 북캉스’나 ‘카페 북캉스’를 즐길 수 있다. 코로나 때문에 발은 묶였지만, 동서양 피서 명소인 산과 바다의 시원함을 한곳에서 다 누릴 수 있으니 “더워서 못 살겠다”는 푸념도 잠시 내려놓을 일이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