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숫자로도 드러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퇴직연금을 포함한 공·사적 연금의 소득대체율(연금 가입기간 순소득 대비 연금 비율)은 43.4%로 은퇴 전 소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미국은 이 비율이 83.7%, 프랑스는 73.6%, 독일은 68.0%, 일본은 61.5%였다. 굴리는 것과 묻어두는 것의 차이를 보여주는 실제 사례는 차고 넘친다.
대부분의 중장년층은 퇴직하고 나서야 퇴직 준비가 안 돼 있음을 깨닫는다. 직장생활 28년째인 50대 중반 박모씨는 동료들의 퇴직연금 수익률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연평균 8~9%대는 수두룩했다. 본인은 1.2%였다. 적립금의 98%가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일이 바빠 퇴직연금이 어디에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보지도 못하다 최근에야 확인했다”고 했다. 무관심 속에 수많은 예비 퇴직자의 연금 수익률은 1% 안팎에 머물고 있다.
퇴직연금 컨설팅 업체 머서코리아를 통해 해외 사례를 알아봤다. 호주 시드니에서 직장을 다니는 로건 씨(45)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퇴직연금이 35만4000호주달러(약 2억9800만원)가 쌓였다. 연봉 12만호주달러(약 1억원)를 받는 그는 회사에서 넣어주는 법정 적립금 외에 여윳돈을 추가 납입해 매년 1만4000호주달러(약 1200만원) 정도를 적립했다. 주식형 펀드와 부동산 펀드 등으로 돈을 굴려 연평균 6% 정도의 수익률을 올렸다. 로건 씨는 “60세 은퇴 시점에 110만호주달러(약 9억3000만원)를 모아 퇴직 후 매년 7만호주달러(약 5900만원) 정도를 받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와 머서코리아를 통해 수집한 사례를 분석해보면 미국 호주 등 ‘연금 선진국’의 근로자들과 한국 근로자들은 퇴직연금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컸다. 한국 근로자들은 퇴직연금이 ‘최후의 안전판’이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반면 미국과 호주 근로자들은 퇴직연금 적립금을 ‘종잣돈’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고 있었다.
한국도 미국 호주와 비슷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연금계좌를 통해 금융상품에 투자하면 금융소득이 발생해도 인출 전까지 과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같은 제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근로자는 극소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퇴직연금 적립금의 89.3%가 원리금 보장 상품에 들어 있었다. 개인이 퇴직연금 상품을 직접 고를 수 있는 확정기여(DC)형도 83.3%가 원리금 보장 상품에 방치돼 있었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퇴직연금 시장은 원리금 보장 상품 비중이 수년간 90% 안팎을 차지하는 ‘위험으로부터의 도피’ 현상이 고착화됐다”며 “투자 포트폴리오와 자산 배분에 대한 근로자의 이해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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