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간 올림픽 여자 단체전 9연패(連覇), 남자 단체전 2회 연속 우승. 한국 양궁의 창대한 영광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시작은 미약했다. 1959년 수도여고 체육교사로 재직하던 고(故) 석봉근 대한양궁협회 고문이 청계천에서 줄 없는 중고 활대를 구입해 연습한 게 시초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이 선도하던 세계 무대에서 한국은 비주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한국 양궁은 압도적인 세계 1위로 뛰어올라 수십 년간 정상을 굳게 지켰다. 중국 독일 러시아 등 스포츠 강국의 도전을 모두 뿌리치고 초격자를 벌린 양궁의 쾌거는 세계 무대에서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는 우리 기업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뛰어난 선수들의 공정한 경쟁이 한국 양궁의 압도적 위상을 이룩했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장기 집권’하는 비결을 설명하기 어렵다. 핵심은 ‘이기는 습관’을 시스템으로 구축한 데 있다. 철저한 준비와 점검, 리스크 관리, 튼튼한 인프라와 독보적 기술력 확보, 공정한 경쟁과 선발 등의 토털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한 결과다.
그중 첫 번째가 철저한 디테일이다. 대한양궁협회가 발행하는 ‘국가대표팀 운영 매뉴얼’은 분량이 700쪽을 넘는다. 여기엔 선수들이 선수촌에 소집된 첫날 입어야 할 복장, 신체검사를 위한 병원 예약 전화번호를 비롯해 지도자와 선수가 숙지해야 할 모든 정보가 빠짐없이 들어 있다. 매뉴얼 곳곳에는 과거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겪은 어려움과 새로 터득한 노하우 등 ‘암묵지’에 가까운 정보도 녹아 있다. 선배들이 겪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경기 전략도 철저한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마련된다. 국제대회를 마칠 때마다 감독들이 작성하는 보고서에는 한국 선수와 상대 팀의 경기 기록부터 국가별 종합 전력 분석 등이 모두 적혀 있다. 특정 팀을 상대로 몇 점을 득점해야 승리 확률이 높아지는지에 대한 통계학적 분석까지 포함돼 있다. 선수 선발과 전략 수립에 비합리성이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훈련은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선수 중 상당수는 예상보다 큰 카메라 셔터 소리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전 대회보다 포토라인이 사로(射路)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3일 랭킹라운드에서 한국 선수들은 포토라인과 가까운 가장 오른쪽에서 경기를 치르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른쪽에 섰던 안산은 사진 기자들과 불과 3~4m 거리에서 셔터 소리를 들으며 연달아 10점을 쐈다.
현대차그룹은 1985년 정몽구 명예회장이 대한양궁협회장에 취임한 이후 37년간 양궁 인재 발굴과 첨단 장비 개발 등에 약 500억원을 투자했다. 2005년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은 정의선 회장은 2016년 국내 최대 규모의 ‘현대차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를 신설하는 등 양궁의 저변을 크게 넓혔다. 그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정 회장이 한국 선수 전용 휴게 공간을 양궁 경기장 옆에 만들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후원자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협회와 선수, 감독은 하나로 뭉쳐 경기력 향상이라는 목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2020년 대표 선발전에서 어깨 부상으로 포기했던 김제덕은 협회의 방침 덕분에 다시 기회를 잡아 금메달을 쏠 수 있었다.
윈앤윈은 세계 양궁장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는 토종 기업이다. 한국 양궁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던 박경래 윈앤윈 대표가 1993년 설립했다. 박 대표는 “당시 미국과 일본산 활이 세계 시장을 장악했지만 단점이 있었다”며 “선수들의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제품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독자적인 개발에 나섰다”고 말했다.
윈앤윈의 활은 가볍고 탄력성이 뛰어난 ‘나노카본’ 소재로 제작됐다. 타사 제품에 비해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고, 탄착군을 정확하게 형성해 양궁 선수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각국 양궁 대표팀의 약 40%가 윈앤윈의 활을 사용하고 있다. 경쟁사인 미국 호이트 제품과 엇비슷한 시장 점유율이다. 박 대표는 “최상의 품질을 얻기 위해 매년 매출의 20~30%를 연구개발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성수영/김동현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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