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이상 업력을 자랑하는 장수기업이 즐비한 국내 식품시장에 빅뱅이 몰아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품업체 간 경쟁은 드물었다. 농심은 라면, 오뚜기는 소스, 동원은 참치 등 20여 개 업체가 반세기 이상 고유 영역을 지켜왔다.
오랜 묵시적 불가침 동맹은 가정간편식(HMR)의 확산과 코로나19를 맞아 와해되고 있다. 모든 식품업체가 간편식이란 신대륙에 뛰어들어 경쟁하기 시작했다. 대형마트, 편의점 등 유통업체는 물론 호텔, 맛집 등 외식업체, 스타트업, 인플루언서까지 가세했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식품 시장에 전례 없는 춘추전국 시대가 열렸다”고 분석했다.
국내 쌀 소비량을 살펴보면 간편식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통계청의 양곡 소비량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각 가정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7.7㎏으로 전년 대비 2.5% 감소했다. 최근 5년간 8% 이상 줄었다. 반면 지난해 간편식용 쌀 소비량은 10만2955t으로 전년 대비 4.6% 증가했다.
간편식이 집밥보다 맛과 가성비에서도 경쟁력을 갖추면서 이런 추세는 가속화할 전망이다. 프레시지의 밀키트 ‘밀푀유나베’(1~2인용 기준) 가격은 1만3900원이다. 이 제품의 식재료를 별도 구매하면 최소 2만원이 든다. 간편식을 사먹는 게 30%가량 싼 셈이다.
e커머스 혁명은 식품 시장의 빅뱅을 불러온 촉매제다. 과거 식품 제조사의 주요 판매망은 대형마트였다. 입점 조건이 까다로운 한정된 대형마트, 백화점의 매대에 들어가기 위해선 오랜 제조 노하우와 업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온라인 유통망 매대는 무한 확장이 가능한 공간이다. 제품 기획력과 마케팅 능력만 있으면 스타트업은 물론 인플루언서도 네이버, 쿠팡, 마켓컬리 등 온라인 채널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히트 상품을 만들 수 있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더 이상 CJ, 농심 등 제조사 브랜드를 보고 제품을 사지 않는다. 마켓컬리에서 판매하는 ‘이연복 목란 짬뽕’의 제조사는 식품전문 OEM 업체 면사랑이다. 이 제품의 제조사 면사랑을 아는 소비자는 많지 않다. 이연복을 보고 제품을 산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이제 소비자들은 식품 제조사보다 제품 자체 콘텐츠를 보고 제품을 산다”고 설명했다.
유통 채널을 확보하고 있는 대형마트,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뿐만 아니라 마케팅 능력이 있는 식품 스타트업들은 얼마든지 제조력 있는 OEM 업체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핫도그업계의 우양, 탄산수업계의 건강한사람들, 두유업계의 한미헬스케어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식품 OEM 업체가 생겨나고 있다. 식품업계에 따르면 전국 식품 OEM 업체는 약 30만 개다. 기존 대기업에 납품하던 OEM 업체들에 스타트업도 제조를 맡기게 되면 품질 격차는 사라진다.
전문가들은 e커머스에 이어 식품시장 빅뱅이 본격화했다고 보고 있다. 3~5년 안에 식품업계에서도 쿠팡, 마켓컬리와 같은 신흥 강자들이 탄생할 것이란 얘기다. 푸드 스타트업 프레시지, 쿠캣 등이 대표적인 후보로 거론된다.
한 푸드테크업체 최고경영자(CEO)는 “CJ제일제당, 농심, 오뚜기 등 식품 대기업이 주도해온 국내 식품시장에 지각변동이 시작됐다”며 “식품 대기업들이 기존 성공 공식에 안주한다면 새롭게 식품 제조에 뛰어든 후발주자의 도전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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