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들이 내놓은 ‘백신 관광’ 패키지 상품에는 언제 백신을 맞을지 모르는 사람들의 문의가 몰리고 있다. 1회용 얀센 백신을 포함한 9박12일 상품은 900만원, 2회까지 접종해야 하는 화이자·모더나의 4주짜리 장기체류형은 1500만원 선이다. 귀국 후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데도 수요가 계속 늘고 있다.
미국행 ‘백신 원정’은 다른 나라에서도 성행하고 있다. 지난해 말 인도에서 시작돼 올해 멕시코, 태국, 일본, 대만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가격리 의무도 없다. 괌은 전 세계를 상대로 ‘백신 관광’ 광고까지 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의 배경을 미국의 ‘백신 파워’에서 찾는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코로나 발병이 늦었는데도 백신 개발에는 앞섰다. 정부가 모더나에 25억달러, 화이자에 19억달러 등 180억달러(약 20조원)를 선(先)지급하며 연구개발을 도왔다. 타국 제약사에도 거액을 지원했다. 그 덕에 전 국민이 내년까지 맞고도 남을 백신을 확보했다.
한국의 올해 백신개발 예산은 686억원에 불과하다. 5개 업체가 백신을 개발 중이지만 언제 나올지 모른다. 해외 백신이라도 충분히 구해와야 하는데, 지금까지 백신 구입비를 다 합쳐봐야 5조원밖에 안 된다. 백신이 모자라니 방역지침만 강화되고, 자영업자의 생계는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그동안 정부가 뿌린 재난지원금만 50조9000억원이다. 이번 5차 지원금 34조9000억원까지 합하면 85조8000억원에 이른다. 이 돈의 10%만 백신 구입에 썼더라면 지금의 ‘백신 대란’을 줄일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나친 공포심리도 문제다. 델타 변이 출현 후 확진자가 늘어난 것과 반대로 사망자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의 코로나 현황판에 따르면 이달 치사율은 올 1월에 비해 영국은 약 10분의 1, 한국은 14분의 1로 낮아졌다. 그런데도 전 국민이 ‘백신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으니 너도나도 국경을 넘는 ‘백신 엑소더스’ 행렬을 탓할 수만도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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