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円低)'가 일본 기업의 실적을 개선시켜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오랜 믿음이 산업구조 변화로 인해 깨지고 있다. 엔화 가치하락이 경제성장률을 끌어내릴 뿐 아니라 일본 전체를 빈곤하게 만든다는 분석이 나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계열 경제연구소인 일본경제연구센터는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0엔 떨어지면(엔화 환율 상승) 국내총생산(GDP)이 0.5% 감소한다는 분석 결과를 4일 발표했다.
수출가격 상승에 의한 수익성 개선보다 수입가격 인상에 따른 비용 부담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생산시설의 해외이전으로 수출 의존도가 낮아진데다 매년 17조엔(약 179조원)어치의 화석연료를 수입하는 산업구조로 인해 일본의 무역수지 적자가 잦아지고 있어서다.
제조업과 비제조업, 에너지산업 등 모든 영역에서 엔저는 경제성장률에 역효과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에너지산업이 경제성장률에 미치는 악영향은 -4.5%에 달했다.
탈석탄 사회에 진입해 산업구조가 크게 바뀌는 2050년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엔화 가치가 10% 하락하면 경제성장률이 0.4% 낮아졌다. 화석연료 수입량이 80% 감소하지만 정보통신(IT) 등 다른 영역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수입물가 부담이 여전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고바야시 다쓰오 일본경제연구센터 수석 연구원은 "디지털화가 늦은 탓에 해외의 소프트웨어와 크라우드 등 인터넷서비스와 정보통신(IT) 기기의 수입량이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바야시 수석에 따르면 엔저로 인해 에너지산업이 경제성장률에 미치는 악영향은 2015년 -4.5%에서 2050년 -2%로 줄어든다. 하지만 통신·정보서비스 산업의 악영향이 -0.5%에서 -1%로 확대되면서 -0.3% 수준이었던 비제조업의 마이너스 효과도 -1%로 커질 전망이다.
2015년 경제성장률을 1% 가까이 끌어내렸던 제조업이 2050년에는 근소하게 플러스로 전환하지만 GDP를 개선시키는 수준은 아닐 것으로 예상됐다.
일본경제연구센터의 분석은 일본 정부의 환율 정책에 변화가 필요함을 수치로 짚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역대 일본 정부는 '엔고(円高)' 해소에 정책을 집중해 왔다. 엔화 가치 하락에 따른 기업 실적 향상을 전면에 내세운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정권의 대규모 경기부양책)가 대표적이다. 산업계도 수출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정부에 엔화 가치 하락을 요청해 왔다.
하지만 신흥 개발도상국과 가격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엔저 정책은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일본인을 빈곤하게 만들고 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진단했다.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을 연명시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의 구조 전환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구조전환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임금이 오르지 않고 소비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주요국 근로자들의 평균 연봉은 2000년 이후 10~40% 올랐지만 일본만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달러 기준 일본 근로자의 임금 수준은 한국보다 10% 낮아졌다. 사사키 도오루 JP모간체이스은행 시장조사본부장은 "일본의 임금 수준은 신흥 개도국에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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