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최수앙(46)은 2000년대 초반부터 극사실주의 인체 조각으로 평단과 미술시장에서 명성을 쌓았다. 손발톱과 피부 질감까지 몸의 세부를 낱낱이 새기는 작업은 기계 없이 손으로만 석고를 깎아낸 덕분에 가능했다. 하지만 20여 년간 쉬지 않고 이어진 작품 활동은 그의 팔을 갉아 먹었고, 2018년에는 인대가 파열돼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조각 방식을 고심했다. 그의 근작들은 인체의 해부학적 재현을 넘어 새로운 조형의 경지로 도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가 김길후(60)는 1999년 자신이 그린 작품 1만6000여 점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개척하기 위해 무(無)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였다. 2013년에는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이름을 김동기에서 김길후로 바꿨다. 자신의 인생행로처럼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추상화를 그리는 김 작가는 지난 4월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받는 등 최근 미술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우는 두 작가의 전시가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각각 열리고 있다. 최수앙 개인전 ‘Unfold’와 김길후 개인전 ‘혼돈의 밤’이다.
최수앙은 이번 전시에 작품 세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올해 신작 21점을 내놨다. ‘조각가들’은 공동 작업 중인 조각가 세 명의 뼈와 근육을 표현한 작품이다. 언뜻 보면 학습용 인체 모형처럼 실제 몸을 정밀하게 묘사한 듯하지만, 각 근육의 모양은 작가의 상상에 따라 조금씩 변형돼 있다. ‘손’은 팔의 골격과 근육을 조각한 작품이다. ‘조각가들’의 근골보다 더 단순화된 형태지만 독특한 조형미가 느껴진다.
기름을 먹인 두꺼운 종이에 존재하지 않는 도형의 전개도를 그린 ‘언폴디드’ 연작은 조각과 회화의 경계선에 있는 작품이다. 최 작가는 “팔 수술로 활동을 쉬면서 이미 알고 있는 해부학적 지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조형에 접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며 “그 덕분에 기존의 작업 습관 등 정해진 시스템 너머의 가능성을 보게 됐다”고 했다. 전시는 오는 29일까지.
김길후는 이번 전시에서 회화 20점과 조각 3점을 선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무제’(2021). 흑백의 바탕에 폭 15㎝의 평붓으로 단숨에 그은 동색 구리색 청색의 선들이 강렬한 조화를 연출한다. 윤진섭 미술평론가는 그가 작품을 그리는 모습을 두고 “붓을 들고 춤을 추는 무당 같다”고 했다. 자아를 의식하지 않고 단숨에 붓 가는 대로 그려야 예술과 우주의 본질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김 작가의 지론이다.
‘노자의 지팡이’(2019)는 삼발이 형태의 뼈대와 지팡이 모양의 나무, 회화를 섞어 만든 조각이다. 작가는 “세속적인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원시적인 본질로 회귀하고자 한 노자의 사상을 떠올리며 만들었다”고 했다. 이런 설명처럼 작가 자신도 상업적인 성공엔 별반 관심이 없다. 이번에 나온 그의 150호 작품 가격은 10억원이다. 판매 수익을 올리려는 계산 없이 작가가 뜻대로 매긴 값이다.
김 작가는 베니스비엔날레 중국관 예술감독이던 왕춘천(王春辰)의 기획으로 2014년 베이징 화이트아트박스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등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독창적인 작품을 꾸준히 선보여 왔다. 학고재갤러리의 온라인 전시에서는 전시장에 나오지 않은 작품까지 42점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전시는 2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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