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중국을 ‘21세기 최대 지정학적 도전’으로 규정했다. 경제와 안보의 교집합을 국가전략으로 속속 올려놓고 있다. 향후 100년의 산업혁명 주도권을 내줄 수 없다는 미국은 1940년대 ‘국가는 왜 과학기술에 투자하는가’에 답한 버니바 부시의 ‘끝없는 프런티어’까지 소환했다. 중국이 타깃인 ‘혁신 및 경쟁법안’은 미국식 산업정책의 대전환이라고 할 만하다. AI 양자기술 등의 연구개발(R&D)에 290억달러(약 33조4000억원)를 배정하고 반도체 공장과 R&D 거점 등에 520억달러(약 59조9000억원)의 보조금을 투입한다는 것이다. 중국을 따돌리기 위해서라면 정부·의회가 기업과 손잡고 뭐든 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일본은 미·중의 흐름을 ‘경제·산업정책의 신기축(新機軸)’이라고 분석하며 기술·경제·안보 연계를 강화하고 있고, 유럽연합(EU)은 회원국 결속으로 맞대응에 나서고 있다.
민·관 역량을 결집하는 ‘국가의 시간’이 찾아왔다. 한국은 어떤 대응을 하고 있는가. 기업이 하는 디지털 전환이 ‘종(縱)’이라면 기업·산업의 경계를 넘는 디지털 전환은 ‘횡(橫)’이다. 후자는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지만, 한국에서는 디지털 대전환을 선도할 ‘문샷(moonshot)’ 같은 국가 차원의 담대한 도전이 없다. ‘AI 혁신 허브’란 이름을 붙이고 5년간 445억원를 투입한다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프로젝트가 단적인 사례다. 누군가는 1조원 규모의 국가적 비전을 상상했겠지만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기획재정부가 R&D 예산 총액과 부처별 규모를 할당하고 부처가 요구하는 예산을 바탕으로 편성하는 지금의 구조에서 국가 차원의 전략적 자원 배분은 불가능하다.
곳곳에서 제2, 제3의 ‘타다’로 불리는 신·구산업 충돌이 발생하는데 국가가 손을 놓고 있는 것도 문제다. 국가 간 데이터 이동이 기본인 디지털 무역협정 또한 국내 반발 극복이 변수다. 대전환의 철학과 원칙이 없는 정부는 디지털 개방을 이끌기 어렵다. 국가가 소프트웨어(SW) 교육 확대를 주저하는 상황은 직무유기에 가깝다. 디지털 전환을 위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디지털 전환이 지체되면 기본소득이고 뭐고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에너지 전환을 포함한 탄소중립은 더 큰 난제다. 제조업 경쟁력을 가진 한국과 잃을 것도 없는 EU의 부담이 같을 수 없다. ‘탄소중립 2050’ 로드맵이 가정하는 수많은 기술적 실현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삐끗하면 해당 산업을 접어야 할 판이다. 탄소중립이 국가 생존이 걸린 과제인 이유다.
국가는 개별 기업이 해결하기 어려운 핵심기술에 전략적 자원배분을 함으로써 기업에 신뢰할 만한 신호를 빨리 보내야 하지만, 소식이 없다. 사람·돈·지식이 대전환에 유리한 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기업의 각자도생조차 어렵다. 탄소중립은 디지털 전환과 마찬가지로 경제·사회 전반의 전환과 동행해야 한다. 예상되는 수많은 갈등 해결도 국가의 몫이다. 환경단체와 손잡고 탄소세를 도입하면 탄소중립이 된다는 주장, 탈(脫)원전만 바로잡으면 탄소중립이 된다는 주장 모두 무책임하다.
대선후보들이 경쟁적으로 ‘공정’과 ‘정의’를 외치지만, 대전환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전환기 리더십’을 강조한다. 전환기에 어떤 질서가 형성되는지가 이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전환기 리더십의 세 가지 요건으로 ‘시대적 의미를 아는가’ ‘구현할 정책 비전이 있는가’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를 제시한다. 다음 5년 ‘국가의 시간’을 이끌겠다는 대선후보들은 전환기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지 자문해 보라. 국가생존이 걸린 대전환의 지휘봉을 급조된 대통령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위험한 도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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