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미 연합훈련, 중단돼선 안된다

입력 2021-08-04 17:33   수정 2021-08-05 00:04

2002년 김대중 정부 당시 조성태 국방부 장관은 김일철 북한 인민무력부장과의 회담을 통해 ‘철도·도로 공사 관련 비무장지대 개방과 통행 안전’에 관한 합의를 이끌었다. 당시에도 북한은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남북관계의 장애물이라고 비난했는데, 막상 회담이 시작되자 김일철은 군대가 훈련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말해 우리 측의 우려를 씻어냈다고 한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입장이 돌변하는 북한식 협상술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북한의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비난하며 ‘그 규모나 형식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는 말로 훈련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나아가 문재인 정부가 큰 용단을 내리는가를 예의주시하겠다며, 희망이냐 절망이냐를 선택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스스로 차단한 통신선을 복원한 지 며칠도 안 돼 값비싼 청구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요구는 문자 그대로 어처구니가 없다. 대북전단을 문제 삼아 통신선을 차단하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그들이다. 이런 도발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표현의 자유’ 침해로 헌법소원이 제출되기까지 한 ‘대북전단금지법’을 만들며 북한의 요구에 호응했다. 북한의 제대로 된 사과나 대한민국 국유재산에 대한 구상권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통신선 복원만으로 기뻐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도 북한은 자신들이 마치 커다란 은혜라도 베풀고 있는 양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

물론 연합군사훈련이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다. 국가이익의 필요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북한의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 북한의 핵 위협으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하기 위해 한·미 연합방위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비핵화 협상의 진전이 연합군사훈련의 조정과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다. 실제로 1994년 제네바 합의, 2018년 싱가포르 정상회담과 관련해 연합군사훈련이 중단된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 북한은 비핵화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들 스스로 차단했던 통신선을 복원한 대가로 연합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대응이다. 이제 임기를 9개월여 남겨놓은 초조함 때문인지, 어떻게든 북한의 요구에 호응하려는 모습이다. 통일부 대변인은 “한·미 연합훈련이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는 계기가 돼선 안 된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한·미동맹을 모욕하는 말이다. 우리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군사훈련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조성한다는 북한의 억지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대변인인가,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가는 공무원이 할 말은 아니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의 국회 정보위 발언도 선을 넘었다. 통신선 복원은 김정은 위원장의 요청이었고,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면 북한도 상응하는 조치를 할 것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북한이 통신선을 차단할 때도 우리의 의사를 묻지 않았는데, 복원할 때라고 우리에게 요청했을까. 통신선 복원에 그 이상의 의미를 묻지 말라는 김여정의 발언을 고려할 때 믿기 어렵다. 박 원장은 연합군사훈련 중단의 필요성까지도 언급했다고 전해지는데, 정보기관이 정책 문제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금기까지도 넘어서고 있다.

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은 한·미 연합방위태세와 대북 억제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북한이 핵무기를 아무리 많이 보유한다 해도, 튼튼한 한·미동맹이 뒷받침되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북한이 연합군사훈련에 딴지를 거는 이유 역시 어떻게 해서든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기 위함이다. 훈련 없는 군대는 강군이 될 수 없고, 훈련 중단을 둘러싼 한·미 정부의 갈등은 동맹의 정치적 결속력을 해친다. 진정 북한만 좋은 일을 하려는지 문재인 정부의 선택을 눈 부릅뜨고 바라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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