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황한 공약을 한 구절로 요약하면 ‘중국·북한식 토지국유제로의 이행’이다. 토지에서 얻는 이익은 ‘불로소득’이니 전액 환수하겠다는 치기가 저류에 넘쳐난다. ‘토지 불로소득론’은 오래전 오류로 판명 난 노동가치설의 변종에 불과하다. 이른바 ‘진보’의 지적 정체와 무모함은 이리도 완고하다.
추미애 후보의 ‘지대 개혁’은 더 문제적이다. 그는 3년 전에도 국회 연단에 서서 “토지세를 높여 매물로 유도한 뒤 국가가 사들이자”고 목청을 높였다. “사용권은 인민이, 소유권은 국가가 갖는 중국식”을 모범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토지 소유 없이 입주권만 거래되는 상하이·베이징의 고급 아파트가 3.3㎡(평)당 2억~3억원으로 서울 강남을 찜쪄먹을 정도라는 사실은 아는지 궁금하다. 정부가 토지 공급으로 막대한 세수를 챙기고 경제를 휘어잡는 ‘빅브러더’ 체제가 부러운 건가.
이런 궤도 이탈은 한국의 성취가 토지사유화 확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만난(萬難)을 뚫고 지주의 땅을 ‘유상몰수’해 농민에게 ‘유상분배’하는 농지개혁을 결행했다. 김일성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반대였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그럴싸하지만 본질은 국유화다. 경작권만 농민에게 주어졌을 뿐이고, 몇 년 뒤엔 그 경작권마저 국영 협동농장이 뺏어갔다.
반면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혁명적 변화를 불렀다. 연간 소출의 150%(5년 분납)만 내면 소유권 이전이 가능해 전체 농지의 92.4%가 자작농지로 바뀌었다. 인구의 40%에 달하던 소작농을 어엿한 자작농으로 우뚝 세웠다. 토지 소유권 유무가 빚은 극과 극의 결과는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베낀 듯 ‘국토보유세’와 ‘토지공개념’을 들고나온 것이 꼭 대선용만은 아니다. 무능을 지탄받는 ‘진보 정치’가 탈출구로 준비한 회심의 카드다. 소주성 예찬에 앞장섰던 유시민 작가, 이정우 교수 등이 ‘지공주의 원조’ 헨리 조지를 상찬하기 바쁜 것도 그런 연유다.
조지는 진지한 학자들로부터 대접받진 못하지만, 다른 세금을 모두 없애고 토지단일세만 걷자는 발상의 참신성만큼은 호평받는다. 한국 진보정치는 오직 징벌적 토지세를 만들어서 돈을 뿌리고 표를 챙기는 ‘일타쌍피’에만 관심이다. 입증된 한국의 성공방정식을 ‘뇌피셜’로 뒤집겠다는 건 도발이고 선동이다. 임상시험도 못한 약을 만병통치약이라며 떠먹이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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