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의 변심일까.’
이달 초 삼성전자 주가를 밀어올렸던 외국인 투자자들이 불과 1주일 만에 차갑게 돌아섰다. 11일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은 석 달 만에 가장 많은 1조6000억원어치 주식을 팔아치웠다. 매물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집중됐다. 삼성전자가 8만원대로 회복하자 ‘피크 아웃(고점 통과)’ 우려가 해소되고 있다거나 외국인의 귀환을 점쳤던 여의도 증권가는 뒤숭숭한 분위기다.
○현물가격도 데드크로스
국내 시가총액 1, 2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이날 급락한 것은 메모리반도체에 대한 암울한 전망 때문이다. 특히 SK하이닉스, 미국의 마이크론 등 메모리 반도체가 사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업의 주가는 직격탄을 맞았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올 4분기 PC용 D램 고정거래가격이 전분기 대비 0~5%가량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고정거래가격은 반도체 제조사들이 수요 기업과 거래하는 ‘도매 가격’을 의미한다. 또 다른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DDR4 8GB) 가격은 작년 말 2.85달러에서 지난달 말 4.10달러까지 상승했다. 트렌드포스는 이 같은 가격 상승세가 4분기에는 꺾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물 가격이 추락하고 있다는 점도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이투자증권에 따르면 최근 D램 현물가격이 고정거래가격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송명섭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이 같은 현상은 고정거래가격의 추가 하락과 반도체 업황 둔화를 암시하는 것”이라며 “전 세계 PC 수요가 줄어들고 있는 데다 서버 기업들의 D램 수요도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협상력 높아진 고객사들
반도체 쇼티지(공급 부족) 현상으로 협상력에서 우위를 점했던 반도체 제조사들의 힘이 예전만 못하다는 분석도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아마존, 페이스북 등 서버용 반도체를 대량으로 구매하는 고객사들이 반도체 가격 협상을 위해 전문 트레이딩 인력을 국내와 대만 업체에서 영입하고 있다”며 “일각에서 부르는 게 값이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송 연구원 역시 “통상 D램 고정거래가격이 분기 초에 결정되는데 이번 가격은 월말이 돼서 정해졌다”며 “그만큼 수요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신진호 마이다스에셋자산운용 대표는 “미국에서 ‘D램은 D램일 뿐(DRAM is DRAM)’이란 얘기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메모리 반도체가 시장에서 단순한 일반 상품(commodity)화 돼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꾸준한 수요가 있으니 이익은 크게 늘어나겠지만 반도체 실적이 주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긴 어려운 시기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결국은 공급의 문제”
전문가들은 결국 공급량이 향후 가격을 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지난달 말 콘퍼런스콜을 통해 “시설투자(CAPEX)를 예정대로 진행하겠다”고 밝히자 시장은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 이후 삼성전자가 대규모 투자의 일환으로 반도체 공급을 늘릴 경우 반도체 가격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경수 메리츠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급량을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반도체 가격과 주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처럼 공급량을 늘리는 출혈 경쟁이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내년 2분기까지 전망을 밝게 보고 있다”며 “주가가 하락했을 때를 매수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반면 김영권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반도체 제조사들이 메모리 반도체를 뿜어내고 있는 것에 비해 스마트폰 출하량, 서버업체의 시설 투자가 받쳐주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부정적인 전망을 전부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오버 서플라이(공급 과잉) 우려가 있는 만큼 투자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