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노믹스] 심장병으로 질병수당·실업급여 받으려던 59세 목수

입력 2021-08-16 09:00  


“양팔을 높이 올릴 수 있나요?” “사지는 멀쩡해요. 내 의료 기록을 보고 심장 이야기나 합시다.” “질문에만 대답하세요. 어쨌든 모자는 쓸 수 있죠?”

평생을 목수로 성실하게 살아온 59세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역할).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일을 못하게 됐다. 심장마비가 와 공사현장에서 추락사할 뻔한 뒤 의사는 일을 그만두라고 했다. 아내는 병으로 죽었고 의지할 자식은 없다. 그는 질병 수당을 받기 위해 국가에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파견업체 직원은 심장과 관련 없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진 뒤 그를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복지제도의 문제를 그려낸 영화다.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 복지제도 자체에 매몰돼 제도의 대상인 국민을 외면하는 관료주의의 현실을 담았다.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은 2016년 칸 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전화해도 직접 찾아가도 매뉴얼만 고수
질병 수당 심사에서 탈락하며 다니엘의 고난은 시작된다. 탈락 편지를 받은 그는 복지센터로 전화를 건다. 대기 전화가 많아 두 시간이 지나서야 상담원과 연결된다. 통화는 답답함만 더한다. “심사관이 탈락을 통보하는 전화를 해야 재심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편지를 받고 본인이 직접 전화를 했는데도 심사관으로부터 탈락 전화를 또 받아야 한다는 말이, 다니엘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센터로 찾아가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얼굴을 마주한 직원은 더 냉정하다. 심사관의 전화를 기다리든가, 돈이 필요하면 구직 수당을 신청하라고 한다. 의사가 “인공 심장을 이식해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당장 먹고 살 돈이 없는 다니엘은 구직 수당을 신청한다.

로치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며 수많은 사람의 실화를 녹였다고 말했다. 영화의 배경인 영국은 복지의 역사가 깊은 나라다. 1940년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공공 의료 등 높은 수준의 복지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시민이 혜택을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절차가 너무 불편하다.

그 배경에 뿌리 깊은 관료주의가 있다. 독일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정의한 관료주의는 엄격한 위계질서와 고도화된 분업 등이 특징이다. 효율성이 장점이나 책임 소재가 명확한 만큼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무사안일주의가 생길 수 있다. 자신들이 담당하는 제도의 취지보다 제도를 따르고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제도화의 덫에 빠지기도 한다.

영화 속 직원들도 매뉴얼밖에 모르는 기계에 가깝다. 심사관은 다니엘이 의사의 소견을 받아와도 규정대로 팔다리가 멀쩡하니 ‘일할 수 있다’고 단정한다. 다니엘이 구직 수당을 신청하는 동안 한 직원이 도와주자 상사는 “잘못된 선례가 남는다”고 타박한다. 시민의 사회 안전망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복지 제도인데, 정작 제도의 존재 이유인 시민은 그들의 관심 밖이다.
선별적 복지 vs 보편적 복지
다니엘은 구직 수당 대상자가 된다. 수당을 계속 받으려면 일정 시간 이상 구직 활동을 해야 한다. 컴퓨터를 못 하는 다니엘은 아픈 몸을 이끌고 공사장을 찾아다니며 펜으로 쓴 이력서를 돌린다.

그러나 센터 직원은 “부족하다”고 한다. 컴퓨터로 작성한 이력서도, 구직 사이트에 접속한 기록도 없는데 구직 활동을 했는지 어떻게 증명하냐는 것이다. 몇 번 받지 못한 구직 수당은 끊긴다. 식료품 무료 지원을 받을지 묻는 직원에게 다니엘은 답하지 않고 센터를 떠난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았는데, 나이가 들어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아픔과 가난을 애써 증명하려는 그에게 돌아온 건 수치심이다.

질병 수당과 구직 수당은 선별적 복지다. <그림1> 취약계층 등 특정 조건의 국민에게 제한적으로 제공되는 복지 서비스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초생활수급제도가 대표적이다. 혜택을 받으려면 조건에 충족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반대 개념인 보편적 복지는 조건 없이 모든 국민이 혜택을 받는다. 무상급식, 기본소득 등이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 지급된 재난지원금의 경우 1차는 전 국민에게 지급된 만큼 보편적 복지다. 소상공인에게 집중된 2차 이후 재난지원금은 선별적 복지에 해당한다.

선별적 복지는 예산이 한정된 현실에서 효율적이다. 필요한 사람에게 혜택이 집중된다. 그러나 대상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사각지대에 놓이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 스스로의 가난과 질병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상처를 입는다는 비판도 있다.

보편적 복지는 모든 국민이 혜택을 받는 대신 비용이 소요된다. 예산이 무한대라면 상관없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해 세계 주요 국가의 국가부채<그림2>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클 수밖에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부채(D2) 비율이 2019년말 41.9%에서 지난해말 49.5%로 오른 것으로 추산했다. 영국은 85.4%에서 101.6%로, 일본은 238.0%에서 268.0%로 상승한 것으로 추정했다. 노유정 한국경제신문 기자
NIE 포인트
① 세금을 더 걷어 실업급여 등 복지를 강화해야 할까, 아니면 개인의 자기책임을 강화하고 복지를 줄여야 할까.

② 절차와 규정만 따지고 소극적인 관료주의에도 불구하고 국가 행정의 효율적 집행을 위해 관료제도를 유지해야 할까.

③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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