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인 지난 10일 발표한 담화의 일부분입니다. 북한은 이 담화를 내놓은지 10시간도 채 되지 않아 남북 통신연락선을 일방적으로 차단합니다. 복구된지 불과 14일만입니다.
바로 다음날 천안함 폭침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진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은 “우리의 선의에 적대행위로 대답한 대가에 대해 똑바로 알게 해줘야 한다”는 협박성 담화를 내놓습니다. 이날 김영철은 김여정의 담화를 인용합니다. 김여정은 지난 1일 “적대적인 전쟁 연습을 벌려놓을지 큰 용단을 내릴지 예의주시할 것”이라며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취소하라고 압박했는데, 한국이 김여정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죠.
김여정이 대남(對南) 담화를 내놓은 것은 이달 들어서만 두번입니다. 김여정의 담화에는 유독 ‘계산’이나 ‘대가’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원색적인 표현으로 ‘남조선 때리기’에 전념하는 김여정의 담화와 그에 따른 우리 정부의 반응을 일대기로 정리해봤습니다.
김여정은 앞서 자신들의 방사포 도발에 대해 유감을 표한 청와대를 정면으로 겨냥합니다. 김여정은 “훈련은 주업이고 자위적 행동”이라며 “남쪽 청와대에서 ‘강한 유감’이니 ‘중단 요구’니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우리로서는 실로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한미연합훈련에 대해 표하는 입장과 정반대의 전형적인 ‘내로남불’ 주장입니다.
이어 “우리는 군사훈련을 해야 하고 너희는 하면 안 된다는 논리에 귀착된 청와대의 비논리적이고 저능한 사고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며 “겁을 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짖는다고 했다. 딱 누구처럼…”이라고 덧붙입니다. 북한이 원색적 표현을 써서 대남 비방을 하는 것은 늘상 있어왔던 일이었지만 그 말이 소위 ‘백두혈통’이라 자칭하는 김여정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당시로선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겁먹은 개’라 지칭한 대상이 다름아닌 청와대였음에도 우리 정부는 침묵합니다. 다음날 여상기 당시 통일부 대변인은 “따로 언급할 사항은 없다”며 “다만 정부는 남북 관계 발전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해 남북이 상호 존중하며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언급합니다. 장관급인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통상적인 군사행동에 청와대가 직접 나서 유감을 표명하니까 그야말로 대노하는 김정은 위원장을 옆에서 본 김 부부장이 오빠의 심정을 헤아려 직접 움직인 것”이라며 오히려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북한은 김여정의 ‘데뷔 담화’로부터 엿새 뒤인 같은달 9일, 동해상으로 단거리미사일 3발을 발사합니다. 청와대는 “북한이 2월 28일과 3월 2일에 이어 대규모 합동타격훈련을 계속하는 것은 한반도에서의 평화 정착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일주일 전 같은 도발 때 입장문에 포함됐던 ‘강한 유감’, ‘중단 요구’ 등의 표현은 모두 빠졌습니다.
통일부는 이날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자청합니다. 여 대변인은 “정부는 (일부 탈북민단체의) 전단 살포가 접경 지역 긴장 조성으로 이어진 사례에 주목한다”며 “접경지역 국민들의 생명·재산에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는 중단돼야 한다”고 밝힙니다. 정부 입법도 제도 개선 사안으로 검토한다고까지 밝힙니다. 이어 “대북 전단과 관련해서는 판문점 선언에 관련된 사항이어서 정부는 판문점선언 이행 차원에서 그 이전부터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고 덧붙입니다.
6월 8일, 더불어민주당이 대북전단금지법 처리를 공언합니다. 김태년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백해무익한 대북 전단 살포는 금지돼야 한다”며 “원 구성이 완료되면 대북전단 살포금지 입법을 완료하겠다”고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걸 민주당 의원(현재 무소속)은 자신의 1호 법안으로 대북전단금지법을 발의하고 한 방송에 출연해 “대북전단을 살포한 탈북자 단체들의 순수성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음날 북한은 모든 남북 간 통신선을 완전히 차단한다고 발표합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를 보도하며 김여정과 김영철이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한 단계별 대적사업 계획들을 심의했다”는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통일부는 북한의 통신선 차단 다음날 대북 전단을 살포한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와 박정오 큰샘 대표를 경찰에 고발하겠다고 밝힙니다. 남북교류협력법상의 반출 승인 규정을 위반했고 남북 정상 간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해 남북 간 긴장을 조성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김여정 담화 날만 해도 “현행 교류협력법으로는 대북전단 살포 규제가 어렵다”던 통일부가 엿새만에 교류협력법 위반이라고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언론의 비판이 이어지자 12일 통일부는 “내부 혼선으로 표현이 잘못 나갔다”며 경찰 고발이 아닌 수사 의뢰라고 말을 바꿉니다.
그런데 북한은 3일만인 16일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합니다. 한국 정부가 170억원의 예산을 들여 개소한 연락사무소는 1년 9개월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다음날 김연철 당시 통일부 장관이 “남북 관계 악화의 책임을 지겠다”며 떠밀리듯 사의를 밝힙니다.
6월 30일, 앞서 별도 법 제정까지는 필요없다던 송영길 민주당 의원(현 민주당 대표)이 “6월 초순 시작된 북한의 도발의 시작점이 대북전단”이라며 대북전단금지법을 대표발의합니다. 21대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의 1호 발의 법안이라 더욱 힘이 실렸습니다. 법안 발의에는 이낙연·이인영·전해철·김홍걸·윤건영·이재정 의원 등 외통위 소속 민주당 의원 12명이 참여합니다. 전단 살포에 실패해 미수에 그쳐도 최대 징역 3년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강력한 처벌 규정을 담았습니다. 야권에서는 ‘김여정 하명법’이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각국 외교부와 국제 시민단체들이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며 연일 성명을 발표했지만 결국 같은해 12월 보수 야당들의 전원 퇴장 뒤 재석의원 187명 만장일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한국 정부를 향한 요구처럼 들리는 이 말을 내뱉습니다. “정확히 들었으니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고 아마도 정확히 ‘계산’돼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강 전 장관이 같은달 5일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중동 지역 다자안보 회의인 '마나마 대화'에 참석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도전이 북한을 더 북한스럽게 만들었다”며 “조금 이상한 상황”이라고 말한 것을 겨냥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공교롭게도 외교부 장관은 다음달 정의용 현 장관으로 교체됩니다.
이어 “남조선 당국자들이 늘 하던 버릇대로 이번 연습의 성격이 '연례적'이고 '방어적'이며 실기동이 없이 규모와 내용을 대폭 축소한 컴퓨터 모의방식의 지휘소훈련이라고 광고해대면서 우리의 '유연한 판단'과 '이해'를 바라고 있는 것 같은데 참으로 유치하고 철면피하며 어리석은 수작이 아닐 수 없다”고 맹비난합니다. 이달 나온 김여정의 담화들과 마찬가지로 “합동군사연습 자체를 반대하였지 연습의 규모나 형식에 대하여 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훈련 축소는 의미가 없다는 점도 강조합니다.
새로운 카드도 꺼내듭니다. 바로 대남 대화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금강산 관광입니다. 김여정은 “현 정세에서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대남대화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정리하는 문제를 일정에 올려놓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우리를 적으로 대하는 남조선 당국과는 앞으로 그 어떤 협력이나 교류도 필요 없으므로 금강산 국제 관광국을 비롯한 관련기구들도 없애버리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통일부는 즉각 “훈련이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는 계기가 돼서는 안 된다”며 앞서 이인영 장관이 여러 차례 언급한 훈련 연기 입장을 재확인합니다. 이어 “남북관계가 조기에 개선되고 비핵화 대화가 빠른 시일 내 재개돼야 한다는 입장에도 변화가 없다”며 “정부는 이번 훈련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겠다는 말로 담화에 대한 입장을 대신한다”고 밝힙니다.
당시 통신선 복원에 대해 한국은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있던 때였습니다. 특히 청와대와 통일부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친서를 통해 성사됐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를 통해 남북 화상회담이나 더 나아가 남북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까지 언급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김여정이 이러한 희망을 단칼에 잘라버립니다. 김여정은 “(통신선 복원을) 두고 남조선 안팎에서는 나름대로 그 의미를 확대해 해석하고 있으며 북남 수뇌회담 문제까지 여론화하고 있다”며 “때 이른 경솔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합니다. 이어 “통신연락선들의 복원에 대해 단절되었던 것을 물리적으로 다시 연결시켜 놓은 것 뿐이라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달지 말아야 한다”며 “섣부른 억측과 근거없는 해석은 도리어 실망만을 가져올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다음날 통일부와 여당 일부 의원들이 훈련 연기를 촉구하고 나섭니다. 이종주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통일부는 연합훈련이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는 계기가 돼선 안 된다는 입장”이라고 강조합니다. 설훈 민주당 최고위원이 즉각 훈련 연기를 주장하고 나선데 이어 고민정·윤미향·우상호·김홍걸 의원 등 총 74명의 범여권 의원들이 연기를 촉구하는 연판장을 돌립니다.
그런데 이날 김여정은 그동안 담화에서는 없던 새로운 요구를 꺼내듭니다. 바로 주한미군 철수입니다. 김여정은 “조선반도에 평화가 깃들자면 미국이 남조선에 전개한 침략무력과 전쟁장비들부터 철거하여야 한다”며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고있는 한 조선반도 정세를 주기적으로 악화시키는 화근은 절대로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2018년 이후 3년만에 처음입니다.
김여정의 담화는 점점 수위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소위 북한 ‘로열패밀리’로서는 처음으로 휴전선을 넘어왔던 김여정은 자신의 오빠도 인정했다던 주한미군 철수까지 언급했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향후 북한이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카드로 내밀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주한미군 철수가 혹여나 북한 비핵화에 대한 상응조치가 되는 날이 올까 우려스럽습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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