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둥지' 떠나 핀테크로…'금융 메기' 성장에 베팅한 증권맨들

입력 2021-08-17 17:28   수정 2021-08-18 01:35


증권사 리서치센터는 요즘 이코노미스트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자연스레 연봉도 오르고 있다. 또래 이코노미스트 중에서도 최대 연봉을 받고 일했던 김두언 KB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로보어드바이저 스타트업 두물머리로 이직했다. 이코노미스트가 연구소, 공공기관으로 이직하는 경우는 많지만 스타트업으로 옮긴 사례는 그가 처음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려면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려는 의지가 김두언 이코노미스트가 전직한 계기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실물 경제를 설명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실물 경제와 주식시장의 괴리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김 이코노미스트는 “기존 경제학 이론에 빅데이터 분석을 더해 자산시장에 대한 분석과 예측 기능을 실험해 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두물머리에서의 직책은 ‘빅데이터 이코노미스트’. 그는 “장기 트렌드를 보는 이코노미스트의 관점에서 인공지능(AI) 엔진의 고도화에 기여하고 싶다”며 “연봉은 6년 전으로 돌아갔지만 후회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민아 전 대신증권 연구원도 “현장에선 수많은 혁신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애널리스트들은 제3자 입장에서 ‘잘 안 될 것 같다’고 탁상공론할 때가 많다”며 “지금은 현장에서 실체가 있는 서비스를 직접 키워나간다는 점에서 훨씬 흥미를 느낀다”고 설명했다.
어떤 비전을 두고 일하는가
수억원대 연봉을 받던 최봉근 전 홍콩시립대 재무금융학 교수는 지난해 로보어드바이저 스타트업 파운트에 AI코어본부장으로 합류했다. 연봉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스톡옵션에 대한 논의도 입사를 결정한 뒤 했을 정도로 속전속결이었다.

그가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국내 대학은 물론 대형 자산운용사들의 스카우트 제안이 이어졌다. 이런 제안을 뿌리치고 파운트에 합류한 이유를 묻자 최 본부장은 “포트폴리오 이론에 AI를 접목해 개인 맞춤형으로 최적화된 포트폴리오를 짜는 것은 매력적인 연구처”였다고 설명했다.

또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전통 금융권의 보수적인 조직 문화에서는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파운트도 자산 배분을 위한 AI 엔진을 개발하는 데 약 200억원을 쏟아부었다. 김영빈 파운트 대표는 “앞으로 1000억원은 더 투자해야 제대로 된 AI 엔진이 완성될 수 있다고 보는데,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하는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받는 스타트업이 아니면 성공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파운트에는 삼성증권 퀀트 애널리스트 출신으로 코넬대 금융공학 박사를 한 김민복 최고투자책임자(CIO) 등이 포진해 있다.
규제가 없는 곳으로
금융산업은 돈을 다루는 만큼 보안에 철저해야 하고 실패를 용인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국내 대형 자산운용사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한태경 씨는 두물머리에서 투자 솔루션 개발을 맡고 있다. 펀드매니저 시절 그는 투자에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 분석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동유럽 시장에서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데 매년 꾸준히 배당을 주는 기업을 발굴하려면 리서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세계 모든 지역의 기업을 조사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 세계 기업 실적 관련 데이터와 배당 데이터를 모아 분석하면 이름조차 알지 못했지만 수익률이 보장된 기업에 투자할 기회를 발굴할 수 있다.

젊은 매니저의 의욕을 막은 건 ‘망 분리’ 규제였다. 정부가 금융권 외부 인터넷망과 내부 업무망을 분리시키는 망분리 의무화에 나서면서 작업은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씨는 “오픈 소스 생태계에서 AI와 빅데이터 기술이 빠르게 발전할 때 정작 이런 데이터가 필수적인 금융권은 망분리 등의 규제로 뒤처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보수적인 조직문화도 전통 금융사를 떠나는 계기가 됐다. 또 다른 자산운용사에서 퀀트 매니저로 일했던 이현열 씨는 두물머리에서 퀀트 리서치를 담당하고 있다. 그는 국내 금융사의 보수적인 지배구조가 장기 투자를 요하는 퀀트 투자와는 맞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대표 임기가 2년마다 돌아오는 금융지주 산하에서는 장기 투자를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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