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철수 등의 영향으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패권 경쟁이 시작됐다. 아프간은 수세기 동안 영국과 옛 소련 등 강대국들이 ‘빈손’으로 물러나며 ‘제국의 무덤’으로 불려온 곳이다. 미국까지 아프간을 떠나면서 빈자리를 중국과 러시아가 노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영국과 유럽연합(EU) 등 서구권 국가들은 이번 사태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마땅한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 장관은 이날 블링컨 장관과의 통화에서 “미국이 힘으로 해결하려 하면 문제만 더 커진다”며 아프간에서 미국이 맞은 실패를 꼬집었다. 세계 강대국 중에서 중국은 탈레반과 적대 관계가 아닌 몇 안되는 나라로 꼽힌다. 왕 장관은 지난달 탈레반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를 만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이슬람 신자가 많은 신장위구르 지역의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운동(ETIM)’과 관련해 중국과 탈레반이 모종의 합의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고 있다. 중국은 ETIM의 세력 확산을 꺼리고 있다.
외신들은 중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프간 광물자원 개발을 지원해 탈레반의 ‘자금줄’ 역할을 할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앞서 화춘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탈레반으로부터 아프간 재건과 발전에 중국이 참여해달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이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중국이 탈레반을 정식으로 인정하게 되면 파급력이 작지 않을 전망이다.
러시아도 자국 외교 인력을 아프간에 유지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탈레반에 손을 내밀고 있다. 자미르 카불로프 아프간 특사는 이날 인터뷰에서 “미국보다 탈레반이 더 협상 가능한 상대”라고 말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주축이 되고 파키스탄, 이란 등이 가세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반미전선이 강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는 “(탈레반이) 노예의 족쇄를 깨뜨렸다”고 발언하며 반미 성향을 드러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통화하고 곧 화상으로 주요 7개국(G7) 회의를 열겠다는 뜻을 밝혔다. 영국과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격으로 아프간 관련 유엔 결의안을 내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아프간이 테러의 성지가 돼서는 곤란하다”고 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매우 쓰라린 상황”이라며 유엔난민기구(UNHCR)와 협의하고 있다고 했다. 18일에는 EU 내무·외무장관회의도 열 예정이다.
서구권이 탈레반을 압박할 수 있는 ‘지렛대’는 경제 제재와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정도다. 이미 서구권은 탈레반과 관련된 해외 계좌를 동결했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가 아프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서구권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어서 결의안에 반대 의견을 낼 수도 있다. 이들이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에 경제 원조를 하면 서구권의 제재 효력이 약해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