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필 시대 사람이오. 컴퓨터 근처에도 안 가봤어요.” “난독증 대상 특별 상담번호는 있어요.” “그게 몇 번이오?” “인터넷에 나와요.”
59세인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역할)는 질병 수당 재심사와 구직 수당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고난에 부딪힌다. 인터넷이다. 모든 복지 제도는 인터넷으로만 신청할 수 있다. 복지센터에 찾아가도 직원은 종이 신청서를 주는 대신 ‘난독증 대상 특별 상담’을 권한다. 그러나 상담번호도 인터넷에서 찾아야 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는 영국 복지제도의 문제를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평생을 목수로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은 지병인 심장병으로 의사가 일을 그만두라고 하자 국가에 질병 수당을 신청했다. 의지할 아내도 자식도 없는 그는 그러나 형식적인 심사끝에 지급대상에서 제외됐다. 재심사를 요구하려면 심사관의 탈락 통보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말에 다니엘은 당장의 생계 해결을 위해 구직 수당을 신청하려 한다.
디지털 능력과 정보의 격차를 뜻하는 ‘디지털 디바이드’는 복지 영역에서는 큰 문제다. 제도는 디지털 시대에 맞게 운영되는데, 복지가 필요한 취약계층이 디지털에 익숙하지 않으면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어서다. 한국에서는 노년층의 디지털 소외가 두드러진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19 인터넷 이용실태’ 조사에 따르면 70세 이상의 인터넷 이용률은 38.9%에 그쳤다. 60% 이상이 다니엘처럼 ‘연필 시대 사람’이다.
그러나 복지 제도 안내와 신청은 인터넷에서 주로 이뤄진다. 전화 상담 또는 직접 방문하는 방법도 있지만 인터넷을 이용할 때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린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할 때도 한국 사회 디지털 디바이드의 단면이 드러났다. 젊은 층은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으로 손쉽게 신청했다. 노년층은 달랐다.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사무소와 은행에서 긴 줄을 섰다. 컴퓨터, 스마트폰이 없어 재난지원금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노년층의 디지털 소외 현상은 앞으로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사태로 비대면 소비가 주된 트렌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발표한 ‘디지털 디바이드의 실태’에 따르면 65세 이상 중 PC를 사용해 온라인 쇼핑 또는 온라인 예약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6.5%였다.
구직 수당을 포기한 다니엘은 센터 외벽에 스프레이로 글을 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재심사를 요구한다.” 사람들이 몰리고 경찰서에 갔다가 훈방 조치되는 해프닝을 겪은 끝에 그는 재심사를 받게 된다. 담당 의사가 힘을 보태주고 복지사도 “이번 건은 확실하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심사 직전 화장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2016년 칸 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은 제작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실화를 녹였다고 밝혔다. 영국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먼저 수준 높은 복지제도를 시작했지만. 뿌리 깊은 관료주의로 시민들이 혜택을 받으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모두 통과해야 한다.
복지(福祉)는 ‘행복한 삶’을 뜻한다. 국민이 행복하게 살도록 국가가 지원하고 운영하는 제도도 의미한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자영업자와 권고사직을 당한 회사원 등 수많은 이들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재난지원금을 놓고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의 해묵은 갈등도 다시 불거지기도 했다. 다니엘과 같은 이들의 ‘복지’는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노유정 한국경제신문 기자
② 인공지능(AI)과 로봇도우미 등이 인터넷 이용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층을 도울 수 있을까.
③ 질병·실업 등을 입증해야 복지혜택을 받는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복지제도를 누리게 하는 방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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