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앤그레이스? 이거 어느 나라 명품이에요?”
22일 롯데백화점 동탄점 2층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었다. 이탈리아 브랜드 에트로 옆에 자작나무가 나란히 들어선 순백의 공간으로 꾸며진 매장에 쇼핑객들의 눈길이 쏠렸다. 한채윤 대표(39)가 서울 잠실 롯데 에비뉴엘 명품관에 이어 두 번째로 낸 롯데백화점 단독 매장이다. 백화점업계를 통틀어 국내 브랜드가 이런 ‘명품급’ 대우를 받은 건 아서앤그레이스가 처음이다. 에르메스 못지않은 명품 가방을 만들겠다는 젊은 여성 기업인의 당찬 도전이 주목받고 있다.
현대백화점이 올 2월 서울의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며 여의도 더현대서울을 개점했을 때도 아서앤그레이스가 단독 매장을 냈다. 판교점에 이어 두 번째 현대백화점 입점이다. 신세계에도 강남, 대구, 경기, 센텀시티, 타임스퀘어점 등 다섯 곳의 골프 편집숍에 아서앤그레이스 상품이 진열돼 있다.
한 대표가 서울 광장동에 아틀리에(공방)를 직접 운영하며 지난해 거둔 매출은 약 15억원이다. 20~30년 경력의 가죽 장인들에게 월급을 주고, 매장 유지비를 치르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거의 없다. 마케팅에 비용을 쓸 여력조차 없음에도 아서앤그레이스는 오로지 입소문만으로 명품관에 진입하고 있다. 골프용 가방으로 안양CC(삼성그룹 계열), 트리니티CC(신세계그룹 계열) 등 명문 골프장 내 숍에도 입점했다.
한 대표는 백자항아리를 닮은 자신만의 디자인을 도화지로 삼아 각양각색의 가방을 그렸다. 이 중에서 소비자 반응이 좋은 것만 골라 아서앤그레이스의 간판 상품으로 삼았다. 국산을 원했던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무총리 시절 백화점에서 무심결에 고른 서류가방도 아서앤그레이스의 ‘작품’이다.
한 대표의 자신감은 해외 명품 브랜드 못지않은 장인정신에서 나온다. 모든 가방은 광장동 공방에서 100% 수작업으로 제작된다. 아서앤그레이스에 로고가 없는 건 ‘품질이 곧 로고’라는 생각에서다. 한 대표는 “한 땀씩 손으로 바느질한 뒤 손망치 두드리는 일을 수없이 반복한다”며 “금속 장신구도 환경오염 우려가 있는 도금 제품 대신 스테인리스를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가방용 스테인리스 장신구를 고안할 땐 자동차 부품 회사를 찾아가야 했다. 정교한 모양을 내려면 고가의 절단 장비가 필요해서다.
처음엔 신설동시장에서 납품받은 가방을 쿠팡에서 팔았다. 창업 자금은 2000만원. 가방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내가 들고 싶지 않은 가방을 팔아도 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신설동시장 구석구석을 6개월간 돌아다니며 가방 만드는 공정을 배웠다. 이때 가방 장인들이 가죽 냄새 가득한 지하 골방에서 일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백화점에서도 팔리는 유명 국산 가방을 만드는 분들조차 제대로 대우를 못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삼고초려를 했죠. 제 꿈을 믿고 저와 일해달라고요.”
그의 삶의 변주는 유명 소설가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불멸의 이순신’으로 유명한 김탁환 작가가 최근 선보인 장편소설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는 한 대표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았다.
아서앤그레이스는 ‘K명품’으로의 도약을 앞두고 있다. 명품업계 인플루언서인 정윤기 인트렌드 대표(스타일리스트)가 고현정, 김희애, 전도연 등 유명 연예인이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할 때 들고 나갈 가방으로 ‘에·루·샤’ 등 해외 브랜드와 함께 아서앤그레이스를 선정했다. 한 대표는 “유럽의 고풍스러운 어느 도시, 에르메스와 샤넬 사이에 아서앤그레이스 매장이 당당하게 서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고 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