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장기미제 피의자 구속…엇갈린 공소시효 판단이 이끈 반전 [최진석의 Law Street]

입력 2021-08-22 10:50   수정 2021-08-22 11:03

제주에서 1999년 발생한 뒤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는 ‘이모 변호사 피살사건’과 관련해 살인교사 혐의를 받는 김모씨(55)가 구속됐다.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구속되면서 22년만에 사건의 실체가 드러날 지 주목된다. 이 사건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을뻔 했지만 김씨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사건에 대한 김씨와 경찰의 공소시효에 대한 판단이 엇갈리면서 김씨에 대한 검거와 구속까지 이뤄지게 됐다. 이와 관련된 언론 보도들을 종합해 사건 발생부터 김씨 구속까지의 과정을 재구성해봤다. 그리고 공소시효와 관련된 내용들도 정리해봤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제주지법 김영욱 부장판사는 김씨의 주거가 일정치 않고,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지난 21일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 변호사(당시 45세)는 1999년 11월 5일 오전 6시48분께 제주시 삼도2동 한 아파트 입구 인근에 주차된 자신의 승용차 안에서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됐다. 경찰은 인력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지만 좀처럼 단서를 찾지 못했다. 결국 이 사건은 범인을 찾지 못한 채 제주 대표 장기 미제사건을 남아있었다.

이후 작년 6월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김씨가 자신을 조직폭력배인 전 유탁파 행동대원이라고 소개하면서 “1999년 10월 두목인 백모 씨로부터 범행 지시를 받고 동갑내기 손모 씨에게 이 변호사 살해를 교사했다”고 주장하며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경찰은 재수사를 시작해 지난 4월 살인 교사 혐의로 김씨에 대한 인터폴 적색수배 요청을 했다. 김씨는 지난 6월 불법체류 혐의로 캄보디아 현지에서 검거됐고, 지난 18일 국내로 강제 송환됐다. 경찰은 피의자 국외 출입국 기록과 판례 등을 면밀히 분석해 현재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공소시효가 끝난 줄 알고 방송에 출연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김씨는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제주동부경찰서에서 제주지법으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답하지 않다가 “사건 관련 배후 세력이 있느냐”는 질문에 “배후 세력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씨의 신병은 확보됐지만, 김씨가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 가며 밝힌 내용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왜 당시 이 변호사를 살해하라는 지시가 있었는지, 경찰이 추정하는 대로 김씨가 실제 살인을 저지른 것인지 등 밝혀내야 할 의문점이 너무나 많다.

특히 김씨가 자신은 교사범이라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그가 흉기 모양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등 사건에 대한 진술을 상세히 한 점 등으로 미뤄볼 때 그가 실제 살인을 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수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김씨에게 범행 지시를 했다는 당시 두목 백씨, 실제 범행을 저질렀다는 손씨를 조사해봐야겠지만 두 사람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씨가 경찰 조사에서 감춰왔던 진실을 말할 것인지, 이번 수사를 통해 22년 전 사건의 실체가 드디어 선명하게 드러날지 주목된다.

제주 출신인 이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 24회에 합격해 검찰에 입문했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과 추미애 법무부 장관, 홍준표 국회의원 등과 사법시험 동기다. 이 변호사는 서울지검과 부산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하다 1992년 고향인 제주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지만, 제주에 내려온 지 7년 만에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2014년 11월 5일 0시. 김씨는 이모(당시 45세) 변호사 피살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된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씨 생각과는 달리 공소시효는 남아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2015년 7월 31일 개정 형사소송법(태완이법)에 따라 살인사건 공소시효가 폐지됐는데, 경찰은 김씨가 여러 차례 도피 목적으로 해외를 오가면서 이 사건 공소시효 만료일이 태완이법 시행 후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이 출입국 기록을 분석한 결과 김씨는 공소시효 만료 전인 2014년 11월 5일 이전에 여러 차례 해외를 오간 것으로 나타났다. 형사소송법 제253조에 따르면 범인이 형사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국외로 도피한 경우 그 기간 공소시효가 정지된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가 공소시효 만료 전 해외로 출국한 기간을 모두 합치면 만 8개월 이상이 된다. 경찰은 이 출국 기간을 김씨가 형사처벌을 피할 목적으로 도피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씨는 당시 사기 등의 혐의로 입건됐던 상태로, 경찰은 김씨가 해외로 출국했던 이유 중 하나가 처벌을 면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김씨가 그 기간 해외를 오갔던 이유가 한 가지만은 아니었다”며 “수사 과정에서 그 이유 중 하나로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한 도피로 볼 수 있는 진술과 자료 등 실체적 증거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가 A사건에 대한 형사처벌을 면하기 위해 해외로 출국했다 하더라도 그 기간 A사건뿐 아니라 이 피의자와 관련된 모든 사건의 공소시효가 정지된다. 이로 인해 이 사건 공소시효 만료일은 2014년 11월 5일 0시가 아닌, 최소 만 8개월을 제외한 2015년 8월 이후가 된다.

주목할 점은 2015년 7월 24일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 일명 ‘태완이법’이 국회를 통과해 같은 달 31일부터 시행됐다는 점이다. 특히 태완이법은 법이 시행된 2015년 7월 31일을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법 적용이 가능(부진정소급)하게 됐다.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직접 살인범뿐만 아니라 살인교사범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결국 유력 용의자인 김씨가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전 만 8개월간 해외로 출국하면서, 태완이법을 적용받게 된 것이다. 앞서 2007년 12월에도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살인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15년에서 25년으로 연장됐지만, 이 경우에는 법 시행 전 범죄에 대해서는 소급 적용되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출입국 경력은 개인정보이자 수사 사항으로 자세히 말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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