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직장인 박모씨(32)는 지난주 여름 휴가 기간 내내 ‘은행 뺑뺑이’를 돌았다. 2년 전 연 2.84% 금리로 전세자금대출을 받았던 농협은행에서 만기 연장 시 금리가 연 3.5% 안팎으로 뛸 수 있다고 안내받았기 때문이다.
박씨는 발품을 팔아 연 3.05%를 제시한 우리은행에 대환대출 신청서를 냈지만, 결국 3분기 한도가 소진돼 대출이 안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제까지 거래가 없던 SC제일은행에서 겨우 대출을 받은 박씨는 “내가 투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이유로 은행 일각에선 가계대출 총량 규제에서 실수요자를 위한 전세대출을 제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전세대출을 총량 규제에서 빼면 은행은 취급을 지속할 수 있고, 가계대출 총량에 여력이 생겨 추가 대출도 해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지난해 6월 전세대출을 받은 뒤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내 시가 3억원 초과 아파트를 구매하면 기존 전세대출을 회수하는 ‘갭투자 방지 대책’을 마련했다. 이후 실수요자가 아닌 사람이 갭투자 용도로 전세대출을 받는 건 거의 불가능해졌다. A은행 관계자는 “최근 전세대출은 전셋값 상승으로 보증금을 추가로 마련해야 하는 재계약 수요가 대부분”이라며 “집값 상승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으니 전세대출만이라도 총량 규제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B은행 여신 담당자는 “전세대출은 만기가 짧은 데다 보증서를 담보로 해 관리가 용이하고 부실위험도 상대적으로 적다”고 설명했다.
물론 전세대출이 용도에 맞게 쓰이지 않고, 집값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C은행의 여신 담당자는 “전세대출에 대한 별도 통계를 만들고, 용도별로 면밀히 관리한다면 굳이 총량 규제에 전세대출을 포함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전세대출은 그동안 서민대출이라는 인식 때문에 다른 대출에 비해 느슨하게 관리돼 왔다”며 “여윳돈이 있음에도 보증금 한도까지 채워 대출받은 뒤 남은 자금을 주식·코인 투자에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저금리 전세대출이 시중 과잉 유동성을 만들고 자산가격의 버블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홍춘욱 EAR리서치 대표는 “가계대출의 가장 약한 고리가 전세대출”이라며 “개인 간의 사금융에 대해 정부가 보증해주는 형태로 이뤄져왔는데 대출금이 갭투자 자금으로 활용되는 건 큰 문제”라고 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은행 내부에서도 전세대출에 대해 ‘한도까지 더 받으시죠’라고 고객에게 권하거나, ‘안 받으면 바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며 “전세대출을 총량규제에서 빼면 전세금 담보 생활안정자금을 너도나도 받아가는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김대훈/정소람/박진우 기자 daepu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