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같은 미술. 마지막 페이지까지 매직에 가까운 반전 드라마다. 미술사를 이렇게 통쾌하게 뒤집다니….
책 제목 《벌거벗은 미술관》처럼 저자가 까발린 미술사에선 이제껏 잠자고 있던 역사와 인류가 불현듯 깨어난다. 평소 미술관과 박물관의 문턱을 낮추는 데 애써온 노력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으니 독자들은 즐거울 수밖에.
미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원론적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의 작품 ‘나도 아르카디아에 있다’를 먼저 꺼내든다. 모처럼 낙원에 온 목동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어두운 건 ‘너희도 나처럼 죽을 것이다’라는 으스스한 글씨가 새겨진 무덤을 발견했기 때문인데, ‘삶 속에 죽음이 존재하고 아름다운 미술에도 그늘이 있음’을 암시하고자 한 것이다. 미술이 신비주의의 베일에 가려져 고상한 취미나 교양으로 포장될까봐 저자는 “그게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싶어서 이 작품을 전면에 내세운 건데, 이게 사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미술시간에 데생 공부를 한 사람들에게 다음 얘기는 다소 충격적일 게다. 그 유명한 석고상 모델 줄리앙이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 ‘줄리아노데 메디치’를 본뜬 것이라니…. 이뿐만 아니다. 고전미술의 정수로 알려진 ‘라오콘 군상’도 로마시대의 복제품이란 사실에선 할 말을 잃게 한다. 조각이라고 하면 또한 순백색의 대리석이 떠오르겠지만, 고대 그리스의 조각에는 대부분 색이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새하얀 대리석의 표면이 맑고 고상한, 성병도 천연두도 안 걸린 이상주의적 신체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아연실색하게 된다. 저자는 이처럼 신비화된 고전미술의 허상을 까발리면서 미에 대한 고정관념과 환상을 저 멀리 날려버리라고 외친다.
왜 초상화에는 웃는 얼굴이 드물까. 일부 기술적인 요인 중 하나인데, 모델이 웃는 표정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크리티오스 소년’ 등 고대 그리스 조각상은 하나같이 미소가 없다. 특정 개인을 연상시키는 것을 경계한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결과다. 로마시대까지 이어진 무표정함은 당시의 금욕주의와도 닿아 있다. ‘모나리자’에 이르러 옅은 미소가 흐르지만, 현대 중국 작가 웨민쥔의 그림 속 웃음은 가식에 불과하다.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현대의 작품을 통해 문명의 성격을 포착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놀라운 환기력을 갖는다. 독자들의 정서와 사유가 저절로 풍성해진다.
저자의 다음 소재는 미술관과 박물관이다. 박물관 하면 먼저 고상한 지식의 성채 또는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박물관이 걸어온 길에는 제국주의의 역사와 통치의 정당성을 마련하려 했던 국가 권력의 욕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침탈의 전시장이라고 불리는 루브르박물관에 수많은 발길이 찾아드는 이유가 뭘까. 단순히 모나리자의 미소 때문일까. 박물관과 미술관이 영욕의 인류 역사를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가끔씩 그 거울 속이 궁금해 들여다보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미술과 질병의 함수관계는 어떨까. 르네상스시대의 흑사병은 사람들의 일상뿐 아니라 종교적 실천의 양상과 경제활동까지 새롭게 규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미술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건 고통과 위안부터 사후세계의 모습까지 삶의 민낯을 고스란히 녹여냈기 때문이다.
아마도 양정무라는 최고의 안내자가 아니었으면 순백색 석고상에 대한 환상을 영원히 깨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두에 꺼낸 ‘미술은 마술이다’라는 화두가 이 책을 관통하면서 인류와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과 감성의 지평을 대하드라마처럼 확장시킨다. 이 넓어짐을 체험하는 건 온전히 독자들의 몫인데, 이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까.
전장석 기자 saka@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