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주주가치 제고에 공들이는 美 기업

입력 2021-08-27 17:15   수정 2021-08-28 00:04

4217억달러(약 493조2200억원). 애플이 2012년부터 올해 2분기까지 자사주 매입에 투자한 금액이다. 삼성전자 시가총액 445조원(8월 25일 종가 기준)을 넘어서는 주식을 사들여 소각한 셈이다. 250억 주(2014년 1분기 기준)였던 애플 유통 주식 수는 168억 주(올해 1분기 기준)로 줄어들었다.

애플뿐만이 아니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의 벅셔해서웨이는 올 상반기 자사주를 사들이는 데 120억달러를 썼다. 지난해 실적 악화로 어려움을 겪던 은행들도 올해 자사주 매입 행렬에 동참했다. 지난 6월 모건스탠리는 내년 6월까지 120억달러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한다고 밝혔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도 250억달러어치의 자사주를 사들이겠다고 지난 4월 발표했다.

이 같은 기업들의 노력에 힘입어 미국에서 자사주 매입 규모는 사상 두 번째로 많은 수준을 기록했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S&P500 상장기업들은 2분기에만 2000억달러의 자사주를 사들였다. 7월까지 누적 금액은 6830억달러로 2018년을 제외하고 2000년 이후 최대치에 달했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말까지 자사주 매입 규모가 726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자사주 매입은 기업 실적 개선과 함께 미국 주식시장을 이끈 주역으로 꼽힌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자사주 매입 규모가 많은 50개 기업의 올해 수익률은 27%로 S&P500지수(23%)보다 높았다. 자사주 매입은 기업 실적이 개선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로 받아들여져 주가에 호재로 작용한다. 주식을 사들일 만한 자금이 있다는 것은 회사의 현금흐름이 원활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장에는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는 신호를 준다. 기업이 나서서 주식을 살 만큼 회사가 생각하는 기업가치보다 주식시장에서 평가하는 가치가 낮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유통 주식이 줄어드는 것 역시 주가 방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사주 매입이 소각으로 이어지면 유통 주식 수가 감소하고 주당순이익(EPS: 순이익/주식수), 자기자본이익률(ROE: 순이익/자기자본) 등 수익성 지표가 개선된다. 또 배당과 비교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선호하는 투자자도 많다.

물론 자사주 매입이 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연구개발 등 회사 미래에 투자하는 대신 자사주 매입만 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기업 성장과 주가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자사주를 사들여 상속을 위한 지주사 전환 등에 사용하면 소액주주들은 가만히 앉아서 손해를 볼 수 있다.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하면 자기자본이 감소해 위기가 왔을 때 대응이 어려울 수도 있다. 반대로 자사주를 샀다가 소각하지 않고 다시 매도하는 경우에는 고평가 신호로 여겨져 주가 하락을 부추길 수 있다. 주가 상승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확실한 배당을 선호하는 주주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에 지나치게 소극적이란 지적을 받는다. 과도한 자사주 매입의 문제점을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들의 영업이익 대비 자사주 매입 금액 비율은 5%(2020년 기준)로 같은 기간 미국(41.4%)의 8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지난해 금융당국은 코로나19 사태로 시장이 흔들리자 자사주 취득 요건을 완화해주기도 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올해 7월까지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5504억원으로 영업이익 대비 자사주 매입 금액 비율은 0.5%에 불과했다.

다만 변화의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는 건 긍정적이다. 삼성전자는 2018년 이후 22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했다. SK텔레콤 두산중공업 롯데지주 등도 선진화된 주주환원 정책의 일환이라며 자사주 소각을 단행했다.

자사주 매입은 결국 소액주주의 권리를 위해 얼마나 노력할 것인지와 연결된다. 물론 미래를 위한 성장도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 기업의 주가가 저평가되는 이유로 주주환원 정책이 늘 지적된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미국 기업들의 가장 우선순위는 주주가치의 증대”라며 “한국 기업들도 대주주의 이해관계보다 전반적인 주주가치를 올리는 방향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자사주 매입 ETF, 올해 28.5% 수익
자사주 매입이 늘어나면서 관련 기업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의 수익률도 높아지고 있다. 미국 자산운용사인 인베스코가 운영하는 ‘인베스코 바이백 어치버스 ETF(PKW)’가 대표적이다. 이 ETF는 올해 들어 26일(현지시간)까지 28.46%의 수익을 냈다. 같은 기간 S&P500지수의 수익률(19.01%)을 넘어선다.

인베스코 바이백 어치버스 ETF는 자사주 매입을 통해 12개월 동안 5% 이상 주식 수가 줄어든 미국 기업들에 투자한다. 운용자산은 1억7637만달러(약 2064억원)로 금융(30.98%), 전자기술(16.34%), 컨슈머 서비스(15.52%) 등의 비중이 높다. 가장 많이 보유한 종목은 보안솔루션 기업인 포티넷(6.06%, 8월 25일 기준)이다.

미국 외 지역에서 자사주 매입을 많이 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인베스코 인터내셔널 바이백 어치버스 ETF(IPKW)’,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모두 고려해 투자하는 ‘아이셰어즈(iShares) U.S. 디바이든&바이백 ETF(DIVB)’ 등은 올 들어 각각 14.24%, 22.81%의 수익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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