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인기투표'에 의욕 잃은 중기단체

입력 2021-08-31 17:24   수정 2021-09-01 00:13

“인민재판이자 인격 살인입니다.”

중소기업계 대표 경제단체인 중소기업중앙회의 한 임원은 이같이 한탄했다. 8월 초 노동조합이 임원 평가 순위는 물론 자신에 대해 직원들이 지적한 구체적인 불만 사항을 모든 조합원에게 낱낱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자신의 업무나 제대로 하라’는 등의 날 선 평가를 내렸다. 그는 “지난 1년간 직원들을 재촉하며 야근을 밥 먹듯 했지만 돌아온 건 맥이 빠지는 평가 결과뿐”이라며 허탈해했다.

사정은 이렇다. 중기중앙회에서 상근부회장과 감사, 전무, 각 본부장 등 회장을 제외한 임원 9명에 대한 노조의 평가 결과가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인터넷포털 ‘다음’카페를 통해 300여 명 전 조합원에게 공개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인 노조가 30여 년째 해오는 관례다.

임원 평가는 업무수행, 소통능력, 리더십, 도덕성 등 항목별로 점수를 합산해 1등부터 9등까지 매겨진다. 각 임원에 대해 전체 직원들이 무기명으로 적어낸 장점과 단점 등 서술형 평가 결과도 고스란히 공개된다. 임원별로 “소통이 아니라 ‘쇼통’을 한다” “임원 자질이 없다” “짜증스러운 말투다” “‘해라’를 남발한다” 등 적나라한 표현도 등장한다.

좋지 않은 평가로 낙인 찍힌 임원들은 1년 내내 좌불안석이다. 평가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공개 면박을 당한다는 점에서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태다. 일부 임원은 “법적인 조치도 검토하고 싶다”고 토로했다. 인사 전문가들은 이렇게까지 공개하는 조직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고 지적한다. 노동사건 전문가인 손승주 변호사는 “당사자 해명 없이 일방적으로 공개하는 것은 사안에 따라 명예훼손에 해당할 소지도 있다”고 했다. 경제단체 중 노조가 임원을 평가하는 또 다른 곳은 대한상공회의소가 있지만 주요 내용 공개는 회장 등 소수에게만 하고 있다.

노조의 임원 평가 공개 관례는 물론 직원들에겐 용기를 내 쓴소리를 낼 수 있는 ‘대나무숲’으로서 순기능이 있다. 노조 측은 “평가 결과가 공개되지 않으면 직원들의 목소리가 인사평가에 제대로 전달될지 의문”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임원들이 직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조직문화는 생산성 측면에서 후퇴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일부 임원이 “직원들에게 야근을 시키지 말고 개선할 점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663만 중소기업엔 현재 주 52시간 근로제, 최저임금, 중대재해처벌법 등 헤쳐나가야 할 난제가 많다. 그 어느 때보다 힘을 합쳐야 할 중기중앙회 임직원이 서로를 향해 흠집을 내기보다 중소기업계를 위해 헌신하는 조직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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