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빛이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다. 경계도 모서리도 없이 화면에 둥실 떠 있는 듯한 파스텔톤의 색면들이 서로 무수히 중첩되며 연출하는 장면이다. 창호지를 투과한 푸른 달빛, 푸른 가을 하늘에 뜬 뭉게구름, 해질녘 산촌에 지는 노을, 조선백자의 우윳빛…. 형태가 모호한 색의 집합체에 불과한데도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한국적인 이미지들이 마음속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단색화 전설’ 서승원 화백(80·사진)의 근작 ‘동시성(Simultaneity)’ 얘기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서 화백의 개인전 ‘서승원: 동시성-무한계’가 열리고 있다. 1960년대 후반의 초기작부터 올해 그린 최신작까지 서 화백이 지난 반세기에 걸쳐 쌓아온 화업을 아우르는 전시다. 전시장에서는 회화, 드로잉, 판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37점과 아직 공개된 적 없는 작가의 기록물을 만나볼 수 있다.
서 화백은 한국 추상화를 대표하는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1962년 엄격한 조형 구조와 밝은 색면으로 구성한 기하학적 추상을 처음 선보인 이후 화단을 뒤흔든 비구상그룹 ‘오리진(Origin)’과 전위미술운동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창립 멤버로 활약했다. 구상화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 화단은 그의 작품에 대해 “그림 같지도 않다”는 혹평을 쏟아냈지만 서 화백은 묵묵히 추상화 외길을 걸었다.
반세기에 걸친 족적은 그에게 화단의 거목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그는 1963년 ‘오리진 창립전’을 시작으로 ‘청년작가연립전’(1967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전’(1969년) ‘한국 작가, 5인의 백색전’(1973년 일본 도쿄화랑)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1977년 도쿄 센트럴미술관) ‘70년대 후반 하나의 양상전’(1983년 일본 5개 도시 미술관) 등 한국 현대미술사에 남은 주요 전시에 대부분 참여했다. 1974년부터는 모교인 홍익대에서 33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지난 50여 년간 그가 발표한 작품들의 제목은 오직 ‘동시성’ 하나다. 작가는 동시성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형태, 색채, 공간을 통해 하나의 평면에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전시장에 나온 1960~1970년대 작품에는 입체 도형의 전개도 같은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큐비즘(입체주의)처럼 도형의 앞과 뒤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자로 줄을 그은 듯 날카롭고 차가운 기하학적 패턴과 오방색이 연출하는 구성의 미가 돋보인다.
최근으로 올수록 그의 작품에서 기하학적 요소는 점차 희미해진다. 그 대신 서로 겹치는 색면들이 한국적인 정서를 연출한다. 보이지 않는 정서를 눈으로 보여주는 ‘동시성’이다. 작가는 “팔순이 되니 뾰족함을 내려놓고 세상을 관조하게 됐다”며 “작품의 색채는 어릴 적 한옥에 살며 달빛이 드리운 창호지 문이나 집안 곳곳의 도자기를 보면서 받은 영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십 년 세월을 갈고닦은 그의 붓질에서는 일종의 숭고미가 느껴진다. 작가의 인생과 철학, 50년간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얻은 깨달음이 작품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 영국 런던 대영미술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구겐하임, 일본 시모노세키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다음달 9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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