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한가위 ‘깻잎 돈다발’을 묶으며

입력 2021-09-17 06:00   수정 2021-09-17 13:28

들깻잎을 묶으며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맞다 맞어,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린다
어렵다 어려워 말 안 해도 빤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 구름 몇 덩이 지나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


* 유홍준 :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 저녁의 슬하』, 『너의 이름을 모르는 건 축복』 등 출간.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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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추석 황금연휴입니다. 한가위는 오곡이 무르익는 계절의 큰(한) 가운데(가위)에 있는 만월(滿月) 명절이지요. 그러나 올해 한가위는 이지러진 달처럼 한쪽이 텅 빈 ‘반가위’입니다. 다들 코로나에 마음 졸이고, 생활고에 가슴 저리니 추석 느낌이 예년같지 않습니다.

직장인 열에 일곱 명이 고향에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비대면 명절’의 달빛은 그래서 처연하고, 그 아래 수많은 사연들이 아프게 지나갑니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유홍준 시인의 시 ‘들깻잎을 묶으며’로 마음을 달래며 상상으로나마 특별한 한가위를 꿈꿔보면 어떨까요.

시인은 추석날 오후 동생네 식구들과 함께 깻잎을 따면서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라고 농을 건넵니다. 시퍼런 깻잎이 돈이 되고, 푸른 지폐다발이 되는 꿈은 생각만으로도 흐뭇하지요.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우내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는 장면만 떠올려도 군침이 돕니다.

그곳이 ‘어머니의 밭’이어서,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이어서 더욱 푸근하지요. ‘흰 구름 몇 덩이가 지나가는’ 하늘 아래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리는 아내도 오늘만큼은 찌든 가난을 잊고 일상의 근심을 날려버립니다.

시인이 그동안 걸어온 길에는 ‘어렵다 어려워 말 안 해도 빤한’ 고통과 질곡의 옹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경남 산청 출신인 그는 아버지가 몸져눕는 바람에 가난하게 자랐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으로 가 군대 가기 전까지 한복집에서 ‘시다’로 일했습니다.
시다?밀링?산판꾼의 눈물겨운 꿈
제대 후 서울에서 고추 장사를 하다가 부산으로 돌아와서는 쇠 깎는 밀링 일을 했죠. 이후 대구에서 채소 행상을 했고, 경북 영양으로 옮겨 마른 고추 포대 꾸리기와 소금 포대 옮기기, 시멘트 하차하기, 제방 쌓기 등 숱한 품팔이를 했습니다.

그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산판이었죠. 통나무를 메고 산비탈을 내려와 트럭에 싣는 일은 노동 강도가 세기로 유명합니다. 57㎏밖에 안 나가는 몸무게로 100㎏이 넘는 나무를 날라야 했으니 오죽했을까요. 나무를 멘 어깨가 파이고 파여 달걀 하나가 들어갈 만큼 움푹해야 진정한 산판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생활을 지탱하게 해 준 것은 문학의 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진주의 한 제지공장에 들어간 그는 어느 날 구내식당에서 공단문학상 공모 포스터를 보고 용기를 내 응모했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소설 부문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게 더 큰 용기를 북돋워 줬지요. 이듬해에는 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에 올랐습니다.
‘반쪽 한가위’에도 ‘아아, 모처럼의 기쁨!’을
이후 그는 정신병원의 보호사 일을 하면서 ‘쎄가 빠지게’ 문학 공부를 했습니다. 7년 동안 쓴 시가 1000편이 넘었지요.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하고 2004년 첫 시집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을 냈는데, 문단에서 “특출한 물건이 하나 나왔다”는 극찬이 쏟아졌습니다.

“시적 대상의 선정이나 그 대상으로부터 촉발된 상상력의 자연스러움을 보면, 우선 그는 타고난 시적 재능 혹은 시적 감수성을 지닌 시인인 것 같다. 유홍준 시인의 어느 시편에서도 작위적 조탁이나 장인적 기교 같은 것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곳 표현이 거칠지 않고 작품의 완결성에 흠가지 않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오세영 시인)

이렇게 오랜 단련 과정과 독특한 시적 감수성 덕분에 그는 올해 ‘반쪽 한가위’를 맞는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는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해 추석날 들깨밭에서 그가 발견한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을 우리도 함께 누리면서 식구들과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푼 꿈을 펼쳐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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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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