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기사 한 사람을 부양하는 비용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11세기 말에는 기사가 타는 말 한 마리 가격이 황소 5~10마리 가격과 맞먹었다고 한다. 기사들이 입는 갑옷은 그런 말보다도 훨씬 비싼 럭셔리 제품이었다. 말을 탄 기사는 한마디로 값비싼 이동 요새 같은 존재였다. 비유적 표현일 수도 있지만, 구식 가죽갑옷을 대신해 등장한 사슬(미늘) 갑옷은 말보다 네 배에서 열 배나 비싼 것으로 전해진다. 즉 갑옷 한 벌 가격이 황소 20~100마리에 해당했다.
여기에 당시엔 희귀 품목이던 창이나 칼(아서왕의 엑스칼리버 같은 명검의 전설은 그만큼 칼이 귀했던 영향도 있다) 같은 무기류에서부터 종자를 부리고, 먹일 돈도 별도로 포함돼야 한다. 기사로 성장하는 데 교육 기간도 오래 걸린 만큼 십수 년의 교육비용도 고려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번주의 승자가 다음주의 희생자가 될지 모른다”는 표현처럼 언제 어디서 기사가 전사하거나 생포돼 몸값을 지불해야 할지 모르는 리스크도 컸다. 물론 보험은 존재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세의 기사 문화는 용기와 무술의 숙련도뿐 아니라 과시와 낭비가 기사의 미덕으로 칭송되면서 수입이 적은 때라도 지출이 적은 경우는 드물었다. 기사들은 항시 자신의 부를 마구 쓰면서 ‘관대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각종 축연과 술자리, 전장 획득물 분배 등은 당시 기사 생활양식의 일부였다. 저명한 중세사가 조르주 뒤비는 “기사계급이 당대 사회에 보여준 경제적 모습은 전투에 의한 약탈과 관습적 소비”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자연스레 전장에서 전사한 기사들의 갑옷과 장비는 약탈의 대상이 되곤 했고, 전쟁 도중 부상당한 기사는 럭셔리 무구를 노린 보병이나 시중꾼들에게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중세판 ‘슈퍼카’를 유지하는 것은 그만큼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던 셈이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십자군전쟁이나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 등 장기간 전쟁이 벌어지면서 봉건제가 점차 붕괴되고, 대포의 발달 등 전쟁의 양상이 바뀌면서 14~15세기 기사제도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16세기에 기사는 국왕이 수여하는 명예 지위 수준으로 전락했지만 기사도는 명예와 예절을 중시하고 여성을 존중하는 ‘젠틀맨십’으로 현재도 지켜지고 있다.
② 보병 위주의 전투에서 기병 위주의 전투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③ 현대에서도 일부 유럽 국가에서 큰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기사 작위를 부여하는 이유는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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