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려나간 오른팔, 왼손으로만 20분간 치는 피아노 곡의 비밀[김수현의 THE클래식]

입력 2021-09-26 07:02   수정 2021-09-26 07:03

<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두 손을 위해 만들어진 피아노 작품보다 빈약하지 않은 인상을 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모리스 라벨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 남긴 주석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칠흑 같은 어두움이 드리워진 우리의 일상. 온 가족이 한데 모이던 소중한 순간부터 소주 한잔을 앞에 두고 친구들과 밤을 새우던 사소한 자유까지 순식간에 사라졌죠. 매일 전 세계 사람들이 사망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코로나19 종식에 대한 기대감도 식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제 세계 곳곳에서는 코로나19를 하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이자는 '위드 코로나' 정책까지 시행되고 있죠.

피폐해진 것은 비단 공동체 생활에 그치지 않습니다. 2년째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지면서 극심한 취업난을 겪는 청년층과 극도의 외로움을 체감하는 노년층을 중심으로 '코로나 블루' 현상까지 심화되고 있습니다. 의료계에서는 이제 우리 사회가 '코로나 블루'를 넘어 좌절감과 절망감이 동반하는 '코로나 블랙'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나오기도 하죠. 암담한 현실에 우리는 점차 희망이라는 빛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오른팔이 절단되는 비극을 겪고도 끝까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고자 했던 피아니스트의 꿈이 실현된 작품,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현시점에 조명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공허하고 참담한 분위기에 긴장감 넘치는 선율이 서늘한 기분을 들게 하다가도 일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도록 두터운 감정을 전달하는 음악,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모리스 라벨,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명작을 탄생시키다
먼저 현대 프랑스 음악의 거장 모리스 라벨(Maurice Joseph Ravel, 1875~1937)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오른팔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 1887~1961)의 의뢰로 1930년에 작곡된 작품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한쪽 팔을 절단하는 아픔을 겪었음에도 피아니스트로서의 인생을 이어가고자 라벨, 브리튼, 힌데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유명 작곡가들에 왼손을 위한 작품을 위촉했다고 하죠.

당시 라벨은 작품 의뢰를 흔쾌히 받아들였는데, 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택 중 하나였습니다. 라벨은 이미 자신이 초연할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기 위해 준비 중인 상태였고, 금전적으로 어려운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이죠. 라벨은 1928년 발레 음악 '볼레로'로 당대 최고 작곡가 자리에 오르면서 미국 순회공연에서 잇따른 성공을 기록하게 됩니다. 사실상 누군가의 위촉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마음껏 내놓아도 탄탄대로를 걸을 것이 분명했던 상황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벨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작곡을 결심한 데에는 본인도 직접 전쟁에 참전하며 참혹한 현실을 체험했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작곡가로서 새로운 형식에 자신의 역량을 쏟아붓고자 했던 도전 정신도 한몫했죠. 이로써 라벨은 동시에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을 병행하는 일을 벌입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갔던 탓인지 라벨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먼저 완성한 뒤, '피아노 협주곡 G 장조'를 세상에 선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라벨의 작품을 처음 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고 하죠. 비트겐슈타인이 회상한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작품 자체가 훌륭하지 않고, 한 손으로 연주하기에 너무 어렵고 까다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이 직접 곡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라벨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고 하죠. 당시 라벨은 또 다른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로부터 양손을 위한 협주곡으로 편곡해달라는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달 작품에 대한 연구를 지속한 뒤에야 비로소 곡의 높은 예술성과 작품성을 이해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라벨이 연주자들과 타협하며 작품에 손을 댔다면 현재 한 손은 물론 양손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최고의 명작이라고 인정받는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라벨이 작품에 대한 완강함을 표현한 데에는 장애라는 틀에 박혀 쉽고 가벼운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한 손을 잃은 피아니스트에 대한 대중의 편견과 사고방식을 깨기 힘들 것이라는 깊은 의미가 담기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실제로 이 곡은 청중이 눈을 감고 들었을 때, 한 손으로 연주하는 것을 연상조차 할 수 없도록 여러 장치를 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인간이 가지는 한 손의 길이와 손가락 개수가 정해져 있는 만큼, 청중은 이 작품의 선율이 특정 음역에 머물거나 다채로운 음색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 단정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모든 고정관념을 깨부수죠. 엄지손가락이 주선율을 이끌어가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손가락이 반주 및 베이스 역할을 취하면서 라벨의 의도한 음색과 음악적 표현을 모두 실현시킵니다.

이 작품은 1933년 비트겐슈타인과 빈 교향악단의 협연으로 초연됐는데, 당시 대중으로부터 엄청난 찬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곧 자신의 기량에 도전하는 양손 피아니스트들까지 연주에 나서면서,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라면 거쳐야 할 필수 레퍼토리로 자리 잡죠. 오른팔을 잃은 상황에도 연주자로서의 꿈을 지키기 위해 직접 작품을 찾아 나서고, 그 마음을 이해한 세기의 작곡가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담아 세상에 내놓은 걸작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전쟁에 대한 공포와 공허함, 비참함 등이 만연했던 당시의 아픔을 떠올리며 음악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개의 카덴차' 한 손 피아니스트의 완벽함 표현…'전쟁의 고통' 내포
작품은 콘트라베이스와 콘트라바순이 표현하는 어두운 분위기의 선율로 시작됩니다. 안개가 드리우는 듯한 느낌이 들면 이내 군대가 행진하는 듯한 선율이 자리하고, 곧이어 고음과 저음에서 관현악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표현되면서 기괴한 분위기를 형성하죠. 전체 음량이 커지면서 긴장감이 고조됐을 때 모든 오케스트라가 순식간에 소리를 멈추는데, 이때 피아노가 강렬한 등장을 알리면서 바로 카덴차 연주에 돌입합니다.

카덴차란 모든 반주가 사라지고 독주자 홀로 화려한 선율을 선보이는 부분입니다. 연주자의 기교를 최대한으로 발현할 수 있는 영역이죠. 보통 카덴차는 악장의 끝에 자리하는데, 이 곡에서는 도입부와 종결부 두 부분에 걸쳐서 등장합니다. 심지어 라벨은 작품의 전체 연주 시간(약 20분) 중 3분의 1 이상을 카덴차로 둬 왼손만으로 결점 없는 완벽한 연주를 선사할 것을 지시합니다. 오케스트라 뒤에 숨지 말고 한 손의 연주만으로 수백명의 청중을 납득시킬 것을 요구한 셈입니다.

왼손 하나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는 피아니스트는 저음역과 고음역을 빠르게 이동하면서 베이스 영역과 주선율을 분리하는 연주를 이어가야 합니다. 새끼손가락이 누르는 베이스의 울림이 끊기기 전에 빠르게 엄지손가락이 고음역으로 옮겨가 선율을 이어가는 식이죠.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아르페지오를 중심으로 화음의 연타가 잇따르면서 마치 두 손이 서로 다른 음역을 담당하는 듯한 소리를 구현합니다. 선율은 아름다우면서도 구슬픕니다. 쓸쓸한 분위기 속 잔잔한 물결에 빛이 내리고,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음색이 드리우죠.
이윽고 피아노 연주자가 저음부터 고음까지 순식간에 훑고 올라가는 글리산도 기법으로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터뜨리면, 오케스트라가 등장하면서 화려한 압도감을 선사하죠. 곧이어 등장하는 음산한 기운의 관악기 소리가 퍼지면, 고요하면서도 잔잔한 피아노의 선율이 이어집니다. 피아노의 스타카토가 시작되면 곡의 분위기가 반전되고, 귀를 찌르는 듯한 바이올린의 고음이 채워지면서 불안감을 고조시킵니다. 군대 행진 소리를 표현하는 듯한 선율이 이어지고, 피아노는 군인의 발걸음 안에서 뛰어노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주선율을 주고받으며 소리를 키우고 아르페지오의 속도도 점차 빨라집니다. 분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소리가 금세 작아지면서 청중을 집중시키죠. 그러면 피아노 연주자는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카덴차를 연주합니다. 환영을 보는 듯한 처연한 음색으로 끊이지 않는 선율을 연주하면서 청중으로 하여금 혼란스러움을 자아내죠. 암흑 같은 분위기 속 어린 소녀가 서글픈 마음을 읊조리는 듯한 선율은 애통스러운 감정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그러면 곧 금관악기가 경적을 울리고, 군대 행진을 연상케 하는 크고 장렬한 소리가 이어지면서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극한의 상황에도 자신이 추구하는 길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인간의 한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증명한 작품,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코로나19라는 예고 없는 불행과 매일의 고난으로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잃고 있는 이들에게 이 작품은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누구도 외팔 피아니스트가 탄생할 것이라 기대하지 못하던 때 세기의 대작과 완벽한 연주자가 자리했듯, 우리에게도 예상치 못한 때 일상이 회복되는 순간이 찾아오길 희망합니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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