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협조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수단이 있다. 거기까지 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야 한다면 그럴 것."
지나 러만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23일(현지시간)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미국 백악관과 상무부가 반도체 부족 대응을 위해 삼성전자 등 업계 관계자들을 소집한 회의에 맞춰 한 인터뷰였다.
러만도 장관이 이같은 발언을 한 것은 미국 정부가 이자리에서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45일 내로 재고와 주문, 판매 등과 관련한 자발적 정보 제출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명분은 반도체 쇼티지(수급부족)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기업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반도체기업들이 자신들의 재고와 주문량, 생산량 등을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단 한번도 없을 정도로 극비에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나 대만 TSMC와 같은 파운드리는 고객사가 어디인지를 대외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삼성전자의 경우 테슬라의 자율주행칩과 LED 헤드램프 등을 생산한다고 알려졌지만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진 않고 있다. 고객사들이 이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애플과 테슬라 등 글로벌 기업 입장에선 어느 반도체 기업에 생산을 맡겼느냐에 따라 제품의 종류와 성능, 경쟁력 등이 밝혀질 수 있다. 애플에 부품을 납품하는 국내 기업이 내부 보고서에 애플을 '미주향 기업'이라고만 언급하는 것도 이같은 고객사를 의식해서다.
파운드리 입장에선 생산캐파, 즉 생산 능력이 어디까지인 지를 극비에 부치고 있다. 반도체 생산량을 가늠할 수 있는 수율이 대표적이다. 수율은 웨이퍼 한 장에 설계된 최대 칩(IC)의 개수 대비 실제 생산된 정상 칩의 개수를 백분율로 나타낸 수치다. 수율이 높을수록 생산성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수율이 높으면 재료의 사용량이 줄어들어 제조원가를 아낄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수율을 밝히는 순간 해당 반도체 기업의 기술력이 그대로 밝혀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객사와의 가격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기업의 재고와 생산능력 등이 밝혀지면 반도체의 전반적인 가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반도체 고정거래가격은 반도체 기업이 해외 PC 업체 등 주요 고정거래선과의 협상을 통해장기계약 형태로 결정하는 공급가격이다. 만일 반도체 기업이 처리해야 할 재고수량이 많다고 알려지면 고정거래가격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DPA는 1950년 한국전쟁 지원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이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기업들에 필수 물자의 공급 계약을 요구할 수 있다. 사재기나 가격 담합 등을 금지하는 품목을 지정할 수 있다. 또 물자와 서비스, 시설을 배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지시할 수 있으며 필수 물자가 국방의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민간 경제를 통제할 수도 있다.
실제 인텔과 미국 정부는 노골적으로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인텔이 반도체 투자 보조금 유치를 위해 로비에 나섰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WSJ에 따르면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7월 조 바이든 행정부 관리와 만나 백악관 근처에서 루프톱 연회를 열었다. 이보다 앞서 유럽연합(EU) 집행위원을 상대로 팹 건설 제안을 브리핑했다고 보도했다.
업계에선 미국 정부의 미국 내 반도체 생태계 조성과 겔싱어의 파운드리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전략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본다. 인텔은 반도체 부족과 제조 불균형 해소에 앞장설 테니 미국 정부의 보조금도 자국 기업에 더 많이 지원해달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기도 하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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