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를 벗지 못한 또 다른 세력으로 민노총이 있다. 양경수 위원장이 드디어 구속되자 민노총은 ‘본 적도 없는 총파업’을 예고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아직도 1980년대 노동운동을 보는 것 같다. 급기야 민노총 소속 노조원들과 갈등을 겪은 택배 대리점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벌어졌다.
요즘 민노총을 보면 1980년대 영국 노동조합이 생각난다. 권력의 끝을 모르고 내달리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대표적 경우다. 영국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산업혁명을 수행했는데, 그 이전부터 상공업이 번성했기 때문에 노조도 일찍 발달했다. 수공업 시대에 장인 밑에서 일하던 직인들이 단체를 조직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노조는 노동당 창당(1900년)에 역할을 했고 세력을 떨치게 된다. 비슷한 좌파 정당인 독일 사민당이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데 반해 영국 노동당은 한동안 노조가 주도했다. 1970년대 영국 노조는 마음만 먹으면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경제가 곤두박질하고 1976년 영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까지 받게 되면서 노조는 ‘영국병’의 원인으로 비난받는다. 특히 파업 열병이 지목됐는데 근로자 1인당 파업일수가 독일의 25배였다. 그런 상황에서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였다. 결정적 타격은 소위 ‘불만의 겨울’인 1978년 말, 1979년 초에 찾아왔다. 공공부문 노조의 총파업으로 기차, 버스, 지하철 등 모든 교통수단이 정지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일터에 나갈 수 없었고, 병원은 환자를 받을 수 없어 환자들이 죽어갔다. 거리에는 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시신을 매장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정부가 무너지고 1979년 5월에 치른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가 이끈 보수당이 압승했다. 평생 노동당을 지지했던 유권자 가운데 많은 수가 지지 정당을 바꿔버린 결과였다.
대처 총리는 확실하게 노조를 ‘손보겠다’ 공약했고 실천에 옮겼다. 전국광부노조 위원장은 공산주의자임을 자부한 아서 스카길이었는데 그 ‘아서왕’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이다. 1984년 3월부터 1년간의 파업 끝에 노조는 백기를 들었다. 광부노조의 패배는 노동운동 전체를 위축시켰다. 뒤이은 노동당 정부도 대처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당내에서 노조의 영향력을 대폭 축소해버렸다.
물론 대처 총리의 결단이 중요했지만 노조의 횡포에 분노한 국민이 대세에 큰 역할을 했다. 국민의 불편과 국가경제는 아랑곳없이 자기 이익만 챙기던 노조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됐다. 여론조사를 보면, 노조가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생각한 국민이 1979년에는 73%나 됐는데 1987년에는 1%였다.
우리에게도 노동조합이 탄압받은 가혹한 시절이 있었다. 필자는 대학생이던 1970년대에 전태일의 죽음을 봤고 동일방직이나 YH 사건 때 피눈물이 나올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노동자들을 어떻게든 돕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사회·노동사를 전공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지금 잘나가는 귀족노조들은 매년 생산성보다 높은 임금 인상을 받아내고 젊은이들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있다. 방역 지침을 어기고 수천 명이 집회를 열어도 아무 조치도 받지 않는다. 하긴 문재인 정부 권력 배분에서 노조 몫이 3분의 1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친노동 정부가 오히려 노동개혁을 해야 하는데 이 정부는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국가 경쟁력이 뚝뚝 떨어지고 청년 실업률이 심각해진 시점에 제대로 된 노동계 지도자라면 나라의 미래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라가 아니라 당장 내 자식을 생각해도 그래야 한다. 막강하던 노조가 자기 이익만 챙기다 자기들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게 한 예는 세상 곳곳에 많이 있다. 제발 공부 좀 하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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