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바주카포'는 미흡했지만…최장수 日銀총재 탄생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입력 2021-09-28 07:41   수정 2021-12-23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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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설립된 일본은행이 140여년 만에 최장수 총재를 배출한다.

28일 일본은행에 따르면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제 31대 총재(76세·사진)는 오는 29일로 3116일을 재임해 역대 최장수 기록을 세운다. 1946년 6월~1954년 12월까지 재임한 이치하다 히사토 총재의 3115일 기록을 70여년 만에 바꾸게 된다.
◆10년 재임에도 물가목표 실패
31명의 일본은행 총재 가운데 5년 임기를 연임한 인물은 구로다가 세번째다. 2023년 4월까지인 임기를 모두 채우면 일본은행 역사상 유일하게 재임기간이 10년을 넘긴 총재가 된다.

'역대 최장수 일본은행 총재 구로다'는 일본 헌정사상 최장기 정권(7년9개월)이었던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내각과 이를 계승한 스가 요시히데 내각의 유산이다. 10년 가까이 일본의 통화정책을 주도하며 일본은행의 존재감을 부각시켰지만 성과는 미흡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구로다의 일본은행은 '아베노믹스(아베 정권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에 발맞춰 '차원이 다른(異次元) 금융완화 정책'을 10년 가까이 펼쳤다. 시중에 돈을 무제한으로 풀어 일본을 만성 디플레이션에서 탈출시킨다는 전략이었지만 재임 기간 동안 물가상승률 목표치인 2%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 확실시된다.

구로다 총재는 지난 4월 기자회견에서 임기 중 2% 물가상승 목표치를 달성하기 어렵게 됐다며 "시간이 걸려서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난 22일 금융정책결정회의 뒤 기자회견에서는 "지금과 같은 금융완화정책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은 더욱 낮았을 것"이라며 "정책운영은 틀리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구로다 총재는 2012년 12월 제2차 아베 내각이 들어선 이듬해인 2013년 3월 취임했다. 일본은행에 대규모 금융완화를 요구하던 아베 당시 총리는 디플레이션 탈출에 적극적이었던 구로다를 총재로 기용했다.

도쿄법대를 졸업하고 당시 일본 경제의 사령탑인 대장성(현 재무성)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 구로다는 관료 시절부터 일본은행의 소극적인 금융정책에 비판적이었다. 구로다 총재는 취임 직후인 4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일본 국채를 대규모로 매입하는 이차원금융완화를 시작했다.
◆"2년내 2% 물가상승 달성" 호언했지만
그는 "2년 정도 이내에 2% 물가상승률을 달성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금융시장은 구로다 총재의 과감한 정책을 '구로다 바주카포'라고 평가하며 환영했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고 주가는 급상승했다.

일본 재정법은 일본은행이 국채를 직접 사서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재정 파이낸스'를 금지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가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일본은행에 돈을 찍어내게 하는 바람에 재정이 파탄나고 경제를 심각하게 혼란시켰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일본은행법도 일본은행의 독립성을 명시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금리와 물가를 적정 수준으로 유도하기 위해 국채를 시장에서 간접적으로 매입하는 것일 뿐 정부의 채무사정과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행의 국채 매입정책은 사실상의 재정파이낸스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기우치 다카히데 노무라종합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비슷한 상황의 다른 나라 중앙은행 총재들이 재정파이낸스로 오해받지 않도록 발언을 조심하는 반면 구로다 총재는 상당히 노골적으로 '정부에 협력한다'는 표현을 쓴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지적했다.

정작 핵심인 물가상승률은 2014년 초반 1.4%까지 반짝 올랐을 뿐 그해 후반부터는 8년째 1%를 밑돌고 있다. 2016년과 2020년은 물가가 줄곧 마이너스였다.



구로다 총재는 국채 매입량을 더욱 늘리는 추가금융완화(2014년 10월), 여유자금을 일본은행에 예치하는 은행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마이너스 금리' 도입(2016년 2월) 등 특단의 대책을 잇따라 내놨지만 물가는 오르지 않았다.

그때마다 그는 "장기 디플레가 정착되면서 '물가는 오르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관행이 됐다"라는 설명을 반복했다. 장기 침체인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면서 일본인들이 물가가 오르지 않는 디플레이션에 익숙해져버려 통화정책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푸념이었다.
◆10년째 금융완화 곳곳에 부작용
반대로 이례적인 통화정책에 따른 부작용은 커졌다. 초저금리의 장기화로 은행 등 금융회사의 수익성이 악화됐다. 결국 일본은행은 연간 80조엔 규모로 국채를 매입하는 정책을 사실상 포기하고 금리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통화정책을 전환했다.

일본은행이 물가와 싸우는 사이 디플레 탈출의 '발주자'인 아베와 스가 총리는 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아베 전 총리는 2019년 국회에서 "(일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사람이 거의 모두 취업한) 완전고용이 실현됐기 때문에 금융정책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말했다. 고용만 개선되면 물가상승률 목표는 고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였다. 스가 총리 역시 휴대폰 요금 인하를 간판정책으로 내걸며 물가에 하향 압력을 가했다.

금융시장은 2013년 이후 주요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모두 승리했기 때문에 아베와 스가 내각이 2% 인플레 목표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고 분석한다. 아베노믹스가 연출한 엔화 가치 하락과 주가 상승 덕분에 유권자들의 지지율이 오른 덕분이다.

두 총리 입장에서 선거 승리로 통화정책은 달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물가상승률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한 시장 관계자는 "유권자 입장에서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것은 나쁠게 없기 때문에 정치권도 문제시하지 않는다"고 마이니치신문에 말했다.

구로다 총재는 최근 기자회견에서도 남은 임기 동안 "금융완화를 끈질기게 이어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공교롭게도 29일은 일본의 새 총리를 사실상 결정하는 자민당 총재 선거일이다. 일본의 제100대 총리가 구로다 총재와 어떤 관계를 맺을 지도 금융시장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작년 9월16일 스가 총리 내각이 출범했을 때 구로다 총재는 아베 총리와 동반 퇴진설을 부인하고 "남은 임기를 모두 채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일본은행 출신인 아다치 마사미치 UBS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의 경제성장을 위해 물가목표와 재정확장 뿐 아니라 생산성 및 잠재성장률 향상이 중요하다"며 "일본은행의 싱크탱크 기능을 활용해 성장에 필요한 거시경제정책을 제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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