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섬은 국내 여성복 브랜드 중 자타가 공인하는 ‘히스토리(역사)’를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브랜드다. 1987년 ‘마인’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34년차다. ‘시스템’, ‘타임’까지 한섬의 여성복 ‘트리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탄탄한 입지를 자랑한다. 내로라하는 백화점 핵심 점포에서도 해외 명품 못지않은 대접을 받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유행이 변하는 패션업계에서 한섬의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장수 패션 브랜드는 충성 고객을 잡으려다 변화를 놓쳐 무너지곤 한다. 하지만 한섬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가고 있다. 대기업 품에 안긴 디자이너 브랜드는 독창성을 잃는다는 편견도 깨버렸다. 2012년 현대백화점에 인수된 이후 매출이 3배 가까이 늘었다. 이제 한섬은 한국이라는 ‘안방’을 넘어 글로벌 무대로 향하고 있다. 초고가 화장품 브랜드인 ‘오에라’가 첫 신호탄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식구가 된 이후 한섬은 말 그대로 날아올랐다. 2012년 인수 당시 4963억원이던 한섬 매출은 지난해 1조1958억원으로 불어났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1020억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영업이익 1000억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한섬만큼 성공적인 인수합병(M&A)도 드물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현대백화점의 한섬 인수 가격은 4200억원이었다.
한섬이 비약(飛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전문가들은 ‘장기 비전’을 꼽는다. 모기업인 현대백화점그룹은 한섬에 단기적인 실적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투자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100여 명 수준이던 디자이너 인력을 5배 가까이 늘렸다. 인수 당시 570여 명이던 직원 수는 지난해 약 1400명으로 2.5배 늘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기존 브랜드들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리뉴얼 작업을 진행했다.
한섬의 새로운 무기는 ‘오에라’다. 2017년부터 준비를 시작해 최근 시장에 내놨다. 스위스의 유명 화장품 전문가인 ‘닥터 스벤골라’의 연구팀과 협업한 결과물이다. 국내 화장품 브랜드 중에선 최고가다.
패션 이외 사업에는 처음 발을 들여놓는 한섬은 화장품 개발에 신중하게 접근했다. 브랜드 콘셉트를 정하는 데만 2년이 걸렸다. 한섬은 화장품 분야에 관심이 많은 고객 3000명을 대상으로 향, 촉감, 사용감 등 다양한 분야에 설문조사부터 실시한 뒤, 스위스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럭셔리 스킨케어’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한섬 관계자는 “화장품은 피부에 가장 먼저 닿는 제품이기 때문에 원료와 기술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해 M&A를 통해 차별화된 원료와 기술력을 확보했다”며 “화장품 시장 중에 기능성을 강조하는 럭셔리 스킨케어 시장을 정조준해 한섬의 고품격 이미지를 화장품 사업에도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한섬이 5년간 준비 끝에 내놓은 럭셔리 스킨케어 브랜드가 바로 ‘오에라’다. 지난 8월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 오프라인 1호 매장을 열고 이어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과 판교점에도 매장을 냈다. 한섬은 현대백화점그룹의 유통 역량을 적극 활용해 글로벌 시장 진출에도 나설 계획이다. 당장 ‘화장품 큰손’ 중국 시장에는 이르면 올해 안에 한섬의 중국 법인(한섬상해)을 통해 진출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으며, 국내외 면세점 입점도 추진할 예정이다.
한섬은 지난해부터 액세서리 제품 라인업을 대폭 늘리고 있다. 기존 핸드백과 스카프 등 소품류에 그쳤던 제품군을 남녀 신발을 중심으로 주얼리, 모자, 마스크 등으로 다변화한다는 계획이다. 올해 액세서리 제품 수를 지난해보다 30% 늘린 총 1400종을 출시할 예정이다. 한섬이 예상하는 올해 액세서리 사업 매출은 약 500억원이다. 내년부터 액세서리 전문 매장과 온라인 채널 확대 및 면세점 진출 등 본격적인 사업 확장을 통해 연간 매출 규모를 2025년까지 1000억원대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한섬 관계자는 “현대백화점그룹에 편입된 이후 과감한 투자와 연구개발을 통해 패션 사업을 그룹의 성장축으로 육성했다”며 “이런 성공 DNA를 바탕으로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프리미엄 제품과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선보여 ‘토털 라이프스타일 케어 기업’으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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