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주먹으로 시작했다. 19세에 프로복서가 됐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대학은 못 갔다. 건축과에 진학한 친구들 교과서를 빌려 밤새 읽었다. ‘근대 건축의 아버지’인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고 싶었다. 프랑스에 도착하기 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혼자 세계를 떠돌았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80). 그는 ‘독학’과 ‘여행’으로 건축을 배웠다. 귀국한 뒤 새로운 건축미학을 탐구하던 그는 마침내 ‘물의 교회’ ‘빛의 교회’ ‘지추(地中)미술관’ 등을 선보이며 노출 콘크리트 건축의 새 지평을 열었다.
그의 미학은 단순·절제·조화로 요약된다. 인간과 자연, 빛과 그림자, 절제 및 사유의 공간이 그 속에 응축돼 있다. 이를 한데 아우르는 상징어는 ‘빛’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많다. 서울과 강원 원주, 경기 가평에 각각 한 곳이 있고 제주에는 세 곳이나 있다. 서울 마곡지구에 건축 중인 LG아트센터가 내년 봄 완공되면 일곱 곳으로 늘어난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재능교육의 ‘재능문화센터(JCC)’는 두 동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로 이뤄져 있다. 177석의 콘서트홀과 미술관을 갖춘 JCC아트센터는 건축면적 672㎡, 연구동과 연수원을 겸한 JCC크리에이티브센터는 1204㎡ 규모다.
대학로와 혜화문 성곽길을 잇는 길의 입지를 살려 누구나 건물 내부로 편하게 들어와 옥상까지 걸어갈 수 있게 설계했다. 박스 모양의 윗부분을 V자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건물 안으로 지하 정원까지 햇빛이 환하게 비친다.
JCC아트센터 콘서트홀의 음향시설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명창 안숙선, 피아니스트 임동혁 등이 이곳에서 연주했다.
안도는 박성훈 재능그룹 회장의 세 가지 목표인 ‘예술적인 열정과 창의적인 생각, 교육적인 사고를 길러낼 수 있는 공간’을 ‘교육과 예술의 장’이라는 두 건축물로 형상화했다.
원주의 ‘뮤지엄 산(SAN)’은 구룡산 안에 있다. ‘뫼 산(山)’이 아니라 ‘자연(Nature)’과 ‘예술(Art)’이 있는 ‘공간(Space)’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다. 연간 20만여 명이 찾을 만큼 명소다. 2019년 작고한 이인희 전 한솔그룹 고문의 컬렉션 300여 점도 볼 수 있다.
드라마 ‘마인’에 나온 워터가든은 물 위에 건물이 떠 있는 듯한 환상적인 모습으로 인기를 끈다. 수심은 20㎝ 정도로 얕지만 아래에 짙은 먹색 자갈인 해미석을 깔아 깊이감을 더했다. 다랑이논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배우 공유가 커피 광고를 찍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플라워가든에서는 80여만 포기의 꽃이 관람객을 맞는다. 연못 가운데로 난 길 위의 붉은 조각품은 알렉산더 리버만의 작품이다. 돌을 테마로 한 스톤가든은 신라 고분을 모티브로 설계했다. 이곳에도 ‘빛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제주 서귀포 성산읍의 휘닉스 제주섭지코지에는 유리로 세운 ‘글라스 하우스’와 ‘유민미술관’이 있다. 글라스 하우스는 노출 콘크리트 받침에 상자 모양의 유리 건축물을 V자로 벌려 놓은 형태다. 섭지코지의 빛과 공기, 바람이 그대로 스며든다. 유민미술관은 갈수록 낮아지는 모양새다. 두 건물이 하늘과 땅을 향하듯 조화를 이룬다.
서귀포 안덕면에는 본태박물관이 있다. 본태는 ‘본래의 형태’를 말한다. 산방산과 형제섬이 내다보이는 한라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국 전통의 기와 담장을 잘 살린 배치도 이채롭다.
경기 가평에 있는 한화 인재경영원도 자연과의 순응을 고려해 주변의 숲과 부드럽게 융화하도록 설계했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 짓고 있는 LG아트센터는 건축면적 1만5000㎡에 1300석 규모의 대극장, 400석의 다목적 공연장이 들어선다. 2018년 작고한 구본무 전 LG 회장이 전 세계 건축가를 물색한 끝에 안도를 낙점했다고 한다.
그동안 안도의 건축을 보러 해외를 순례하는 여행객이 많았지만,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그의 걸작을 보고 즐길 수 있다. 코로나 시대에 맞는 그의 명언도 함께 새길 만하다. “자기 삶에서 빛을 구하고자 한다면 먼저 눈앞에 있는 힘겨운 현실이라는 그림자를 직시하고 그걸 뛰어넘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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