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DL보다 크레이튼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는 곳이 있을까요. 결단만 내리면 거래는 속전속결일 상황이었죠.”(투자은행 업계 관계자)
크레이튼이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알려진 건 올해 초 무렵이다. 국내 연관 석유화학사들도 발 빠르게 인수 가능성 검토에 나섰다. 하지만 한 발 빠른 곳은 DL그룹이었다. 이미 인수 조건에 대한 검토를 마친 뒤 최종 결론을 앞두고 내부 격론이 오가던 상황이었다. DL케미칼의 목표인 ‘글로벌 20위권 화학사 진입’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데 구성원 대다수가 동의했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코로나19 초반 미국 대부분 상장사가 주가 하락을 겪은 점을 고려해도 크레이튼엔 고질적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대형 M&A로 인한 후유증이 컸다. 포가티를 포함한 경영진은 2016년 13억7000만달러(약 1조7000억원)를 들여 애리조나케미컬 인수를 단행해 사업 다각화를 꾀했다. 애리조나케미컬은 송진 기반 화합물 등 친환경 바이오케미컬 분야에서 독보적인 회사였다. 하지만 두 회사 간 시너지가 좀처럼 발현되지 않으면서 기나긴 부진에 빠졌다.
결국 크레이튼은 혹독한 자산 재평가에 돌입했다. 2019년엔 브라질 자회사를 매물로 내놨다. DL그룹도 인수전에 뛰어들어 막바지까지 경합했지만 쓴맛을 봤던 딜이다. DL그룹은 이 직후인 지난해 크레이튼이 카리플렉스(합성수지고무) 사업부를 연이어 매각하자 재도전해 승기를 잡았다. 크레이튼이 연이어 사업을 매각하자 ‘돈 냄새’를 맡은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경영진이 회사 전체 경영권을 내놓는 데 베팅했다. IB 임원들은 분주히 서류 가방을 들고 크레이튼 본사가 있는 미국 휴스턴을 오갔다.
김상우 DL케미칼 부회장은 장고에 빠졌다. 김 부회장은 카리플렉스 사업부 인수를 진두지휘한 그룹 내 M&A 키맨이다. DL그룹 합류 이전 BNP파리바, 소프트뱅크코리아 등 금융계를 거치며 M&A 실무를 직접 챙겨온 전문가다. 이미 사업부 인수 과정에서 밤샘 작업을 이끌어온 그는 크레이튼 내 다른 사업부의 현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장고에 빠졌던 DL그룹은 인수를 진행하기로 결단했다. 카리플렉스에 공격적 증설을 계획한 상황에서, 원재료를 공급하는 크레이튼에 종속되기보다 회사를 인수해 수직계열화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란 판단이 섰다. 가격 부담보다 인수 직후 곧바로 글로벌 화학사 중 한 곳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시너지에 방점을 뒀다. 포가티를 포함한 경영진과 이사진도 만장일치로 DL그룹으로의 경영권 매각에 찬성했다.
깜짝 빅딜은 크레이튼의 발표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DL그룹 사상 최대 규모 M&A로 부채 등을 포함하면 3조원에 육박한 ‘메가 딜’이었다. 2018년 KCC컨소시엄의 모멘티브 인수에 이어 국내 기업이 또 한 번 글로벌 톱티어 화학사를 인수한 사례로 자리잡았다. IB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한국 기업들도 탐나는 글로벌 기업이 있으면 주가와 CEO 거취를 항상 체크해 공략해야 한다는 교훈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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