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진의 논점과 관점] 대장동 후흑열전

입력 2021-10-05 17:29   수정 2021-10-06 14:05

중국 근대 철학자 리쭝우(李宗吾·1879~1944)는 저서 《후흑열전(厚黑列傳)》에서 위인들의 공통점으로 ‘두꺼운 얼굴(面厚)과 시커먼 뱃속(心黑)’을 꼽았다. 그는 후흑을 세 단계로 분류했는데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덩이처럼 시커먼’ 상태를 초보 단계로, ‘속마음은 칠흑같이 시커멓지만 얼굴은 투명하리만큼 밝은’ 단계를 그다음으로 쳤다. 그러나 이들도 ‘후하나 형태가 없고, 흑하나 색깔이 없는’, 즉 세상은 물론 본인조차 후흑 여부를 인지하지 못하는 단계에 오른 위인을 못 당했다고 한다. 그런 경지에 오른 조조(曹操) 유비(劉備) 같은 인물이라야 천하를 도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장동 '신공' 주목
한국에서도 그런 후흑의 대가를 볼 수 있을까. 가장 기대되는 인물이 이재명 경기지사다. 대선을 5개월여 앞두고 여당 대선 후보 경선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그는 최근 ‘대장동 게이트’ 대응 과정에서 놀라운 후흑 신공(神功)을 선보이고 있다. 다 알다시피 대장동 게이트의 핵심은 민간업자(화천대유와 천화동인 1~7호)들이 1조원 가까운 ‘돈벼락’을 맡게 된 경위와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다. 최근 이를 가늠할 수 있는 내부 녹취록이 나오고, 당시 대장동 사업을 진두지휘한 이 지사 측근이 구속되면서 상황은 점점 이 지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의 진면목은 여기서 나온다. 이 지사는 자신이 직접 설계했다는 ‘단군 이래 최대 개발이익 공익환수사업’이 ‘비리 종합세트’임이 드러났는데도 제대로 된 사과가 없다. 측근 구속에 대해선 “측근이 아니다” “유감이다”며 남 얘기하듯 선을 긋는다. 또 불리한 증거들이 나올 때마다 더 큰소리다. 관련 자료는 공개하지 않은 채 “1원 한장 받은 일 없다” “민간사업자는 알 필요도 없었다”고 주장하다가 이제는 “국민의힘 게이트다” “대장동 사업은 제 청렴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듣는 이의 어안을 벙벙하게 하고, 논쟁을 ‘진영 싸움’으로 몰고가는 신묘함을 리쭝우가 봤다면 가히 ‘후흑 1·2단계’로 칭찬했을 터다(가끔 발끈하는 것을 보면 분명 3단계는 아니다).

이런 이 지사 앞에선 ‘고발 사주’ 의혹에 ‘제보 사주’로 되받아치는 야당 유력 주자도, 이 지사와 매일 설전을 치르는 야당 대표도 모두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정치권에서 누가 그와 견줄 수 있을까. 필자 머리에 떠오르는 이는 문재인 대통령 정도다. 어떤 잘못에도 결코 사과하지 않고(‘부동산 죽비’ 발언은 예외), 불리한 일에는 절대 나서지 않으며, 빛나는 일에는 가장 먼저 나서고, ‘유체이탈’ 화법과 온화한 낯빛으로 속내를 감추는 내공. 만만찮은 후흑임에 틀림없다.
대충 뭉개기엔 악취 심해
대선이 코앞이고, 지지율도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이 시기만 무사히 넘겼으면 할 것이다. 일찍이 조조는 “내가 천하를 배신할지언정 천하가 나를 배신할 수는 없다”며 자신의 앞길을 막는 사람은 지위고하, 남녀노소, 친소여부를 불문하고 죽여가며 천하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조조 같은 두꺼운 낯과 시커먼 속은 가능하겠지만 화근의 싹까지 뿌리째 자를 순 없다. 대장동 사업을 설계할 때만 해도 수익 배분 과정에서 ‘비리 공동체’가 분열하며 녹취록 같은 악재가 튀어나오는 상황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폭로가 더 나올지 모른다. 이 지사는 아직도 “대장동 사업은 사과할 게 아니라 칭찬받을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장동은 그의 바람대로 대충 묻고 가기엔 악취가 너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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