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정재윤 지음, 푸른역사)는 백제사 전문가가 무령왕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백제사의 황금기를 흥미롭게 써내려간 책이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왕릉에 얽힌 고고학 발굴사, 한국과 일본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들을 씨줄과 날줄로 교차하며 흐릿하기만 한 고대사의 진상을 복원할 실마리를 찾아간다.
무령왕의 삶은 신화 속 인물처럼 미스터리투성이다. 그가 과연 누구의 아들인지,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섬 ‘각라도(各羅島)’는 어디인지, 무령왕은 왜 섬을 뜻하는 사마(斯麻·斯摩·嶋: 일본어 ‘시마’에 해당)라는 이름을 지녔는지, 어떻게 일본에서 성장해 백제의 왕이 될 수 있었는지 ‘출생의 비밀’과 관련한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왕’이라는 백제 무령왕의 생전 이름은 물론 정확한 생몰년이 무령왕릉 발굴로 확인된 것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왜곡이 심한 탓에 기존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일본서기》를 재평가하는 계기도 됐다.
묘지석에 새겨진 무령왕의 휘(諱·생전 이름)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마(斯摩)’가 아니라 《일본서기》에 나오는 표기(斯麻)와 같았을 뿐 아니라 523년 사망한 무령왕이 ‘62세로 사망했다’고 명시된 까닭에 《일본서기》 유랴쿠(雄略)일왕 5년(461년) 기사에 기재된 무령왕 탄생 설화의 신빙성도 높아진 것이다.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일본서기》가 백제 사서를 바탕으로 왜곡됐으며, 왜곡된 부분을 걷어내면 원 사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목받았다. 이후 《일본서기》에 언급된 백제계 자료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졌고, 백제 연구는 양적·질적으로 더욱 풍성해졌다. 고고학의 성과가 문헌 사학의 발전을 자극해 입체적으로 과거사의 진실을 찾아가는 선순환 효과가 발휘된 것이다.
무령왕릉의 발굴이 한·일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실마리가 됐다면 얼리터우와 은허, 싼싱두이 등 세계 고고학계의 관심이 집중돼온 중국 고대 유적지 발굴은 세계사의 주요 일원으로서 중국사 초기 모습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귀중한 작업이다.
《중국고고학, 위대한 문명의 현장》(리링 외 지음, 정호준 옮김, 역사산책)은 중국 문명의 정수가 담긴 핵심 발굴현장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 모음이다. 리링, 쉬훙, 탕지건 등 현역 중국 최고의 학자들이 필진으로 총출동했다.
오늘날 중국 고고학은 세계 고고학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는 분야로 평가된다. 풍부한 고대 유적에 ‘중화 문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길 원하는 중국 정부의 지원이 어우러져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폐쇄적·공격적 중국 민족주의의 그림자는 세계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들이 일찍부터 일궈온 높은 수준의 문명이 인류 공동의 소중한 유산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책이 소개하는 10대 유적은 고대 중국인이 걸어왔던 역사의 ‘증인’들이다.
책은 중국 고대사의 실체를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세계 고고학계에 뒤처지지 않고 ‘굴기’하기 위해 발로 뛰는 고고학자들의 모습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주요 유적에서 나온 유물 설명과 발굴 비사는 화려한 도판과 어우러져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싼싱두이 유적 발굴을 트로이 고성 발견에 비견하는 등 때론 1급의 학자조차 중국 중심적 ‘과장’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중국 이외 지역의 외래문화를 흡수한 점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든지 진시황릉에서 발견된 병마용을 그리스·로마 시대 조각과 비교하는 모습은 신선한 느낌을 준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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