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에서 모란꽃에 대한 투기 광풍이 불었는데 17세기 네덜란드의 모습은 당나라의 재판이었다. 16세기 중반 유럽에 들어온 튤립은 1634년 네덜란드에서 ‘튤립 광풍(tulipomania)’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반까지 확산된다. 부자는 물론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까지 튤립 거래에 뛰어들었고, 사람들이 튤립에 열광할수록 튤립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635년에는 튤립구근 40뿌리에 10만플로린이 투자됐다. 튤립이 너무 고가다 보니 미세한 무게 단위인 ‘그레인(0.064799g)’보다도 작은 ‘페리트’ 단위로 팔렸다.
튤립 광풍 전성기인 1637년 3월에는 튤립 구근 한 개 가격이 숙련공 연봉의 10배 이상이었다. 당시 유명 작가 문팅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총독’ 한 뿌리 가격이 밀 두 짐(448플로린), 호밀 한 짐(558플로린), 4마리 살찐 황소(480플로린), 돼지 8마리(240플로린), 양 12마리(120플로린), 와인 476L(70플로린), 맥주 1008갤런(32플로린), 버터 504갤런(192플로린), 치즈 1000파운드(120플로린), 침대 1개(100플로린), 은 물잔 1개(60플로린), 옷 한 벌(80플로린)을 합친 것과 같았다.
희귀종 튤립 수요가 계속되면서 1636년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에서 튤립이 상설 거래됐고 로테르담, 할렘, 레이덴, 알크마르, 호른 등의 도시에서도 상설 장터가 생겼다. 사실상의 정규 선물 거래도 이때 정비됐다.
하지만 이런 ‘바보짓’이 계속될 수는 없었고, 일부 부자는 튤립을 사지 않고 팔기만 했다. 튤립 가격은 계속 떨어졌고, 사람들은 확신을 잃었다. 신뢰가 사라지자 공황이 시작됐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를 4000플로린에 팔기로 계약을 맺더라도 6주 후가 되면 튤립 가격이 300~400플로린씩 떨어진 탓에 거래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다. 계약 파기가 난무했다. 결국 사람들은 구매 가격의 4분의 1에도 사려는 사람이 없는 구근들을 재워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부자가 됐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다시 가난한 사람으로 되돌아갔다. 부유한 상인도 거지가 됐고, 귀족 중에도 재산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즐어든 사람이 적지 않았다. 돈은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돌고 돌았다. 대박을 노리는 인간의 본성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비슷한 형태로 발현되는 모양이다.
② 당나라의 모란꽃이나 네덜란드의 튤립처럼 꽃 한송이의 가치가 지나치게 높게 평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③ 최근 우리 정부는 일정 요건을 갖춘 거래소만 가상화폐 거래를 허용했는데,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에 대한 무분별한 투자가 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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