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중앙아시아를 떨게 한 고구려 출신 부대…끝내 모함에 몰린 '유민 2세대'의 좌절

입력 2021-10-11 09:01   수정 2021-10-12 14:54


8세기 당나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숙적인 투르크(돌궐)는 망했다가 다시 성장하는 중이었고, 서남쪽의 고산 지대에서는 토번(현 티베트)이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는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왔다. 사라센 제국과 토번은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남쪽과 서쪽에서 압박했다. 당나라는 토번과 전쟁을 불사했고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장군에게 토번의 배후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고선지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단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출발해 타클라마칸을 횡단했다. 그 속에는 용맹스러우며 싸움을 잘한다고 평가되는 고구려 병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고선지는 평균 높이가 5000m가 넘는 파미르 고원을 건너 100일 동안을 행군한 끝에 오식닉국(현재 시그난 지방)을 급습했다. 연운보 전투를 벌여 적군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1000마리의 말과 무기 등을 노획했다.
72개 소국 점령한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
그런데 그는 지친 병사들을 남겨둔 채 3일 동안 더 고산을 진군한 끝에 마침내 토번의 거점인 탄구령 정상에 도달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을 마침내 넘은 것이다. 고선지 장군의 군대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계곡을 내려가 소발률국의 수도를 점령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실현시킨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나는 작전이었다. 그는 72개의 소국들에게 항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재빠르게 다가오는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그의 명성과 고구려 부대의 강인함은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 때문에 승리자인 고선지의 행보는 그리 밝지 못했다.
사라센제국·오아시스 도시 연합군과 당이 격돌
그 무렵에 이슬람교 신자인 아랍인들로 구성된 사라센제국은 더 강력하게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고 있었다. 고선지는 750년에 제 2차 원정에 나서 석국(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지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런데 오만한 당나라 정부는 고선지가 끌고 온 석국의 왕을 성문 앞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분노한 오아시스의 도시 국가들은 사라센제국과 연합군을 구성한 후에 당나라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고, 알타이 초원의 투르크도 이에 가세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다시금 고선지에게 7만의 군대를 주면서 전쟁을 지시했다.

751년 7월, 드디어 동·서양의 한가운데이면서, 중앙아시아의 사막 같은 평원에서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가 지휘하는 당나라 군대와 이에 맞선 사라센제국과 오아시스 도시, 일부 투르크 연합군 등이 대회전을 벌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탈라스(Talas) 전투’라고 불렀다.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키르키스스탄에 걸쳐있는 메마른 평원의 탈라스는 유라시아 세계의 방향을 결정지은 대전장이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언덕과 강물, 그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조용한 시골 도시다. 두 차례의 대승리로 이름을 떨친 그였지만, 더 큰 이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고선지의 대부대는 전멸했고, 불과 수천명만이 살아남았으며, 그 또한 간신히 탈출했다.
‘탈라스 전투’에서 패한 당나라
탈라스 전투는 세계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중앙아시아는 원래가 투르크인의 땅이었고, 그 후 지금까지 그들과 연관이 깊다. 만약 당나라군이 승리했다면 당나라 문화와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넘어 서아시아로 파급되었을 것이고, 투르크는 영원히 쫓겨날 수도 있었다. 이 전투 이후에 동서의 세력들은 중앙아시아를 경계로 발전할 수 있었고, 중간 지대인 이 곳은 이슬람 문화권으로 변해버렸다. 탈라스 전투에서 붙잡힌 포로들 가운데 제지공들은 종이 제작 기술을 전달했고, 이 기술은 다시 이슬람 상선에 실려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전해졌다. 그 때 사라센으로 잡혀간 포로들 가운데 고구려인들이 포함돼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지배선, 《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 장군》)
한니발 뛰어 넘는 위대한 군인으로 평가돼
고선지는 패배한 장군의 신분으로 귀국했다가 몇 년 머문 후에 다시 전선으로 나갔다. 755년에 안록산이 난을 일으켰고,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낙양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전하던 고선지는 도중에 모함을 받아 처형당했다.

서양인들은 고선지라는 인물을 발굴해 높이 평가했다.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 헝가리 출신의 역사학자인 오렐 스타인은 고선지를 카르타고의 장군인 한니발,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을 뛰어넘는 위대한 군인으로 평가했다. 중국 측 사료의 기록처럼 유민 2세대인 그는 신조국과 황제에게 충성을 바쳐 기량을 발휘했다.

하지만 끝내는 패배자로서, 배반자로서 처형을 당했다. 그의 삶 속에서 고구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 기억해주세요
고선지 장군과 고구려 출신 부대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힌두쿠시(興都庫什) 산맥을 넘어 72개의 소국들에게 항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재빠르게 다가오는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그의 명성과 고구려 부대의 강인함은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전체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사막 같은 평원에서 당나라 군대와 사라센제국이 벌인 ‘탈라스 전투’ 패배 이후 고선지는 모함을 받아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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