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發 인력난, '로봇 근로자 시대' 앞당긴다

입력 2021-10-08 17:01   수정 2021-10-08 23:44

1940년대 초 미국의 농촌은 극심한 인력난에 빠졌다. 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남성이 군대에 차출됐기 때문이다. 고심하던 미국 정부는 멕시코에서 농번기 때마다 일손을 빌리기로 했다. 1942년 미국과 멕시코의 ‘브라세로(육체노동자) 프로그램’은 이렇게 시작됐다.


종전 이후 새로운 문제가 불거졌다. 전쟁터에 나갔던 군인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실업률이 증가했다. 농촌에선 인건비가 저렴한 멕시코 근로자에게 일자리를 뺏겼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하자 1964년 미국 정부는 브라세로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일자리가 다시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지만 현실은 달랐다. 멕시코 일꾼이 떠난 자리를 농업 기계가 꿰찼다. 비싼 임금을 주고 미국인 근로자를 채용하기보다 생산성이 높은 기계를 들이는 농가가 많았다. 실업률은 줄지 않았고, 일자리를 구한 사람의 임금도 오르지 않았다.

최근 글로벌 노동시장에서 이 같은 ‘로봇 침공’이 재연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코로나19 여파로 외국인 근로자가 떠나가는 등 인력난이 심화하자 로봇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물류창고부터 병원, 레스토랑까지 다양한 산업 현장에 로봇이 등장했다. 산업 전반의 자동화가 빨라지고 있다는 평가다.
자동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로봇 도입이 가장 활발한 분야로는 물류산업이 꼽힌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온라인 쇼핑 수요가 급증했는데, 물류 현장에선 각종 방역 규제와 구인난 등으로 병목현상이 누적됐다. 물건이 있어도 이를 옮기고 배달할 사람과 운송 수단이 부족해졌다. 애플 나이키 등을 고객사로 둔 미국 물류기업 GXO로지스틱스의 샌딥 사카르카르 최고정보책임자(CIO)는 “물류업계에서 자동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며 “우리도 연말까지 870개 물류창고에 있는 로봇을 3100개로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국 물류회사 윈캔튼은 최근 노샘프턴셔에 있는 4만9000㎡ 규모의 물류창고를 조만간 자동화할 계획이다. 이곳에선 온라인 소규모 업체가 주문받은 물건을 분류하고 포장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자동화를 마치면 필수 인력 규모가 30~40% 감소할 것으로 회사 측은 예상하고 있다. 배송 기간 단축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점도 자동화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스캇 프라이스 UPS인터내셔널 사장은 “주문 다음날 바로 배송이 이뤄지는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많다”며 “최근 이스트 미들랜드의 물류시설을 자동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물류창고 자동화의 선두 기업은 아마존이다. 아마존은 2012년 키바시스템(현 아마존로보틱스)을 인수하고 수만 대의 인공지능(AI) 로봇을 투입해 물류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를 통해 연간 30억~40억달러의 인건비를 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기업이 물류창고 자동화에 투자하는 자금은 작년보다 20% 늘어난 360억달러(약 43조원)로 추정된다. 컨설팅기업 가트너의 드와이트 클라피치 연구담당 부사장은 “1980년대에는 기업이 인건비를 아끼려고 자동화에 투자했다”며 “요즘은 일손 부족으로 자동화에 돈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대목 만난 로봇업체
유럽의 와인산업에도 로봇 도입 바람이 불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포도 농장에서 일하던 동유럽·북아프리카 출신 근로자가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인력 부족이 심화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한 와이너리(와인 양조장) 대표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와인업계 경력 50년 동안 지난해 최악의 인력 부족 사태를 겪었다”고 말했다.

유럽 와인업계에서는 기계를 사용해 포도를 수확하면 최고급 등급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대중적인 와인을 생산하는 소규모 와이너리는 포도 수확 기계를 속속 마련하는 분위기다. 이탈리아에서 4대째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는 미르코 카펠리 대표는 최근 8만5000유로(약 1억1720만원)를 들여 포도 수확 기계를 구매했다. 그는 “우리 같은 소규모 와이너리에 로봇 투자 비용은 상당히 부담되지만 어쩔 수 없다”며 “그래도 이제 일꾼을 못 구해 걱정할 일은 없어서 좋다”고 했다.

자동화 바람이 부는 곳은 와인산업뿐만이 아니다.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 화이트캐슬은 최근 햄버거와 감자 튀김을 만드는 로봇을 선보였다. 레스토랑 체인 스위트그린은 로봇 주방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을 인수했다. 미국 시카고 지역에 있는 맥도날드는 드라이브스루에서 고객에게 주문받는 AI 음성 시스템을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로봇 제조업체는 대목을 만났다. 프랑스 농업기계 제조업체 펠랑은 올해 포도 수확 기계 수요가 작년보다 20% 증가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연평균 판매 증가율이 5~10% 수준이었다. 영국의 로봇 스타트업 스몰로봇컴퍼니는 살충제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밀밭에서 잡초를 제거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 중이다. 또 다른 영국 스타트업 자일럼은 잘 익은 과일만 식별해 수확하는 AI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컨설팅기업 앤더슨 관계자는 “인건비가 오르면서 기계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라며 “영국에서는 농업 근로자의 최저 임금이 2014~2020년 34% 상승했다”고 전했다.
로봇 시대 살아남을 직업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자동화 속도가 빨라졌지만 “조만간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모두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개발 중인 로봇을 상용화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데다 복잡하게 얽힌 규제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 옆에서 작업을 돕는 로봇이 우선 도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로봇이 노동시장 구조를 크게 바꿀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는 2019년 한 콘퍼런스에서 “사람처럼 손재주가 있는 로봇을 아직 개발하지 못해 인력을 채용하고 있다”며 “하지만 나는 이게 10년 뒤면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고 말했다. 인간과 닮은 로봇이 나오면 물류창고 직원을 채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논란이 일었다.

가디언은 매우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손재주를 발휘하는 직업이 로봇 시대에도 살아남을 것으로 전망했다. 배관공, 전기기사, 간병인 등이 대표적이다. 또 간호사와 교육자처럼 다른 사람과 정교하고 복잡한 인간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직업, 변칙이 많고 창의력이 요구되는 직업이 승자로 남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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