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내 남북한 정상 화상회담, 내년 2월 중국 베이징 동계 올림픽 계기로 한 남북한 및 남·북·중 정상회담 추진설이 흘러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유엔총회에서 종전선언 제안을 하면서다. 북한이 종전선언과 함께 남북한 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하자 여권은 고무돼 있다.
문 대통령은 “(내년 2월)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2018년)평창 동계 올림픽에 이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또 한 번의 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청와대도 베이징 남북한 정상회담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고 했다. 걸림돌은 북한이 베이징 올림픽 참가가 어렵게 된 것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도쿄올림픽 불참 이유로 북한에게 올림픽 참가 자격을 2022년 말까지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부겸 국무총리는 지난달 30일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 인터뷰에서 IOC에 북한이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겠다고 했다. 김 총리는 “IOC의 관대한 조치를 바란다”며 “그렇게 되면 남북 고위 당국자가 자연스럽게 베이징에서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남북 고위 당국자’는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을 의미한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제재 완화, 대북 지원 카드로 판을 깔고 있다. 정 장관은 미국 워싱턴포스트(WP)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은 북한에 제공할 수 있는 구체적 인센티브(유인책)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현 상황을 방치하면 북한의 미사일 능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를 댔다. 북한의 미사일 고도화가 제재 완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난 1일 국회 외통위 국정감사에서도 “이젠 제재 완화도 검토할 때”라고 말했다.
최근 유럽연합(EU)를 찾은 이 장관은 “우리가 합의를 이루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손을 잡고 베이징 올림픽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나”며 “우리에게 그런 선택과 결단의 시간이 임박했다”고 했다. 또 “북한의 대화 복귀와 비핵화에 대한 전향적인 조치를 견인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인도주의와 민생분야에 있어 대북제재 완화에 보다 전향적인 입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북한이 종전선언 남북한 정상회담 가능성을 거론하고, 통신선 연결을 하며 내거는 조건은 분명하고 한결같다. “이중기준과 적대시 정책을 없애라”는 것은 한·미 연합훈련,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첨단무기 개발 등을 중단하라는 것이다. 또 제재 완화를 위해 미국 설득에 나서라는 것이다. 김정은과 김여정이 남북한 관계 발전 여부는 남측 당국에 달렸다고 한 것에서 그들의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핵·미사일 개발은 ‘자위권’이라고 강변하니 어이가 없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은 미국으로선 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을 이고 사는 한국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오로지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제재 완화, 대북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극초음속미사일을 쏴도 도발이라고 하지 않는다. 북한과 대화를 위한 협상에 나서기도 전에 미리 ‘패’부터 다 보여주고, 당근까지 제시한 것이다. 협상의 ABC에서도 벗어나는 것으로, 이런 저자세가 어디있나 싶다.
이 정부는 2018년 평창올림픽이 남북한 관계 발전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러나 도발을 일삼던 북한이 갑자기 대화에 나서 각각 세번의 남북한 정상회담,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동안에도 뒤로는 핵 미사일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10월과 올해 1월 온갖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LCBM) 등을 선보인 것은 그 결과다.
겉으론 대화, 뒤로는 무력증진이라는 북한의 전형적인 이중전략이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올림픽이 한반도 안보 위기를 대화 분위기로 바꾸는 전기가 됐다고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를 위한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됐다. 북한이 종전선언과 정상회담을 거론하면서도 미국이 받아들이기 힘다는 온갖 조건들을 주렁주렁 단 것도 도발의 명분을 축적하고 제재로 어려움에 처한 북한 내부 상황을 돌파하려는 ‘꼼수’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오로지 베이징에서 남·북·중 정상이 손을 잡고 흔드는 이벤트에만 목매고 있다. 이러다가 한·미 동맹이 균열되고 북한 핵·미사일 고도화의 길만 더 넓혀주는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홍영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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