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문로에서 서울역사박물관 뒤편 경희궁길을 따라 10분쯤 걷다 보면 성곡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미술관 앞 정원은 사시사철 사람으로 바글대는 도심에서 불과 10분 거리에 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미술관 위쪽 카페에서 100여 종에 달하는 식물을 바라보며 차를 한잔 마시다 보면 마치 근교에 나와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 든다.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목련과 벚꽃, 제비꽃이 만개하는 봄이나 단풍이 흐드러진 가을에 가면 특히 좋다.
아르망과 구본주, 성동훈 등 국내외 유명 조각가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 정원을 지나면 단정한 느낌을 주는 성곡미술관 건물이 있다. 미술관 이름은 1995년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회장(1913~1975)의 호를 따서 지었다. 비록 쌍용그룹은 외환위기 등 세파를 이기지 못하고 해체됐지만 미술관이 속한 성곡미술문화재단은 여전히 건재하다. 미술관 역시 도심 속 작은 휴식처이자 현대미술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연간 두세 차례 중견·중진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한국 중견 작가 초대전’이다. 한국 미술계는 허리가 부실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신인이나 원로만 각광받는 분위기 때문이다.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도 40대 이하 신진 작가를 지원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때 미술계에 이름을 떨쳤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중견 작가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성곡미술관의 프로그램은 한국 미술계 전체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다. 2019년에는 성곡미술관 중견 작가 초대전을 통해 소개된 작가의 작품이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등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미술관 관계자는 “중견 작가가 그간 쌓아온 실적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도약할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청년 작가를 소개하는 프로그램 ‘성곡 내일의 작가상’도 1998년부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로 인정받는 전준호 작가(2001년 선정)를 비롯해 지금까지 선정된 52명의 작가가 한국 화단의 중추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금 성곡미술관에서는 중견 작가 민재영의 ‘생활의 발견’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작품 14점을 통해 지난 20여 년간 민 작가가 구축해온 예술 세계를 되돌아보는 전시다. 서울대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한 작가는 한지에 수묵으로 대도시 속 일상을 그린다. 붐비는 지하철 객차 내의 한 장면, 꽉 막힌 도로 위의 자동차들,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 인터뷰 중인 정치인 등 현대인의 일상을 동양화 재료와 기법으로 그려낸 점이 이채롭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 한지 전체에 마치 모니터의 주사선처럼 일정 간격으로 가로선(보조선)을 긋고, 이를 바탕으로 군중의 사실적인 이미지를 정교하게 표현한다. 이를 위해 보도 사진의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직접 모델을 섭외해 촬영한 뒤 자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픽셀을 쌓아올리는 디지털 제작 방식과 동양화풍이 만나서 만들어낸 회화가 색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전시장에서는 1999년작 ‘내일이 오기 전 Ⅱ’부터 코로나19 상황에서 마스크를 쓰고 걷는 군중의 모습을 그린 올해 작품 ‘내일이 오기 전’까지 22년간 작가가 그려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바쁘게 오가는 회사원들을 그린 ‘직장’과 교통 정체를 표현한 ‘오늘’, 비오는 날 꽉 막힌 도로를 화폭에 옮긴 ‘출구 정체’ 등 이미지 대부분은 삭막한 풍경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흐릿함과 모호함이 과거 브라운관 TV의 정겨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작가는 “실험적인 기법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서 여유와 생명의 힘을 발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다음달 2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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