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수 쌤의 국어 지문 읽기] 범인(凡人)이면서 우부(愚夫)인 주인공이 장원급제한 비결은?

입력 2021-10-18 09:00  

[앞부분 줄거리] 일자무식에 머슴살이 하던 민시영은 아내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북한산에 사는 월봉대사를 찾아 가르침을 받는다. 10년이 안 돼 월봉대사는 패글제를 가르쳐주며 민시영이 과거에 응시하도록 한다.

곧 앞서 이끌며 몰아내자 따라 들어가 전정(殿庭)에 숙배하니 임금이 물으시기를,(중략)

“그러하다. 내 어젯밤 몽중(夢中)에 어떠한 도사 한 분이 와 날더러 이르기를 ‘패글제는 이러한 글제를 내라.’ 하되 그 연고를 해득지를 못하였더니 이제야 그 부인의 지성을 상제(上帝)께옵서 감응하시어 내 마음을 깨치게 함이라. 또 몽중 도사는 너의 선생 월봉대사요, 글제의 ‘하득제갈량이라.’ 하는 것은 내 시영을 얻을 징조로다. 오호라,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가빈(家貧)에 사현처(思賢妻)요, 국난(國難)에 사양상(思良相)이라.’ 하였으니 내 나라가 어지러움을 근심함에 또한 양상을 얻었고 네 가빈하니 또 양처를 얻었도다. …”

[가운데 부분 줄거리] 민시영은 사또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으나,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걸인 행색으로 집을 찾아간다.

부인 … 허허 길게 탄식하고 돌아 들어와 이불을 덮어쓰고 스스로 하는 말이,

“… 대장부가 아녀자와 더불어 십 년의 기약을 서로 하였는데 저다지 신의 없이 돌아오니 어찌 그러리오? 비록 그러하나 잠깐 용모를 살펴보니 티끌의 때가 없고 정수리에 은은한 정기가 있고, 미간에 아름다운 태도를 감추고 있으니 의관은 남루하나 완연히 진흙 속의 옥이 티끌 밖에 드러나 있도다. 반드시 무슨 거동이 있을 것이라. … 기약을 어겨서 흔연히 받아들이면 이는 반도지폐(半途之廢)가 될 것이니 물리쳐 나중의 모습을 보리라. 고인이 이르기를, 옛날 소진이도 그 아내에게 곤박함을 보고 스스로 공부한 지 삼 년 후에 육국(六國) 상인(相印)을 차고 다시 만났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리라.”

- 작자 미상,「민시영전」-
머슴살이 하던 … 전정(殿庭)에 숙배하니 … 패글제 … 글제의 ‘하득제갈량이라.’
과거(科擧)는 고전 소설에 빠지지 않는 소재다. 학문 수양을 하다 출세(出世: 세상에 나가 벼슬을 함)해 입신양명(立身揚名: 세상에서 떳떳한 자리를 차지하고 지위를 확고하게 세워 이름을 떨침)을 이상으로 삼았던 양반에게나, 양반으로 오르기를 소원하는 양인(良人: 양반과 천민의 중간 신분)에게나 과거는 매우 중요했다. 15세 이상이면 소과(小科)에 응시할 수 있고 이에 합격해야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데, 각각은 초시(初試)를 거쳐야 복시(覆試)를 볼 수 있었다. 소과 초시 합격자를 초시(한문을 좀 아는 유식한 양반을 높여 이르던 말로도 쓰인다)라 하였다. 소과 복시 합격자는 진사, 생원이라 불렸는데, 대과 초시 응시 및 성균관 입학 자격을 받고 하급 관원이 될 수 있었다. 이때 4대가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이는 양반이더라도 4대 안에 최소한 소과 복시 급제자가 안 나오면 신분이 강등되는 것을 의미했기에 과거는 여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대과 초시는 성균관 유생과 현직 관료도 응시할 수 있었다. 각 도의 인구 비례로 약 240명을 선발했는데, 그들이 예조에서 실시하는 대과 복시에 응시해 33명의 선발 인원에 들면 임금 앞에서 대과 전시(殿試)를 치러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의 순위를 다퉜다. 흔히 말하는 장원급제(壯元及第)는 갑과 1등이다. 33명은 품계를 수여받고(장원 종6품, 갑과 정7품, 을과 정8품, 병과 정9품), 그 중에 현직 관원일 경우 1~4계(階)의 승진을 한다. 전시는 시국 문제에 대한 국왕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치러진다.

이 작품도 과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머슴살이’ 하던 주인공은 양인인 듯하다. 머슴은 주로 농가에 고용돼 그 집의 농사일과 잡일을 해주고 대가를 받는 사내로, 노비는 아니다. 노비는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전정(殿庭: 궁전 뜰)에 숙배(肅拜: 백성들이 왕이나 왕족에게 절을 하던 일)’하고, (패)글제(과거의 문제, ‘시제’라고도 한다)가 ‘하득제갈량(何得諸葛亮: 제갈량과 같은 인재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인 것을 보면 주인공이 치른 과거는 전시다. 조선 후기에 소과를 거치지 않고 대과를 응시하는 것이 늘었고 별시(別試: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던 임시 과거)라 해도, 민시영이 초시나 복시를 거치지 않고 전시에 곧바로 응시하는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생각된다.
일자무식에 … 십 년의 기약 … 공부한 지 삼 년 후에 육국(六國) 상인(相印)*을 차고
대과 중 문관(文官)을 뽑던 문과(文科)는 돈과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웬만한 양반가에서도 어려워 합격자의 평균 나이가 35세였다. 보통 5세 때 천자문을 시작으로 20년 이상 공부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전시 급제자들의 답안지 길이가 보통 10m 이상이었다니, 과거가 얼마나 어려운 시험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민시영은 ‘일자무식(一字無識: 글자를 한 자도 모를 정도로 무식함)’이었고 공부해서 과거 급제까지 ‘아내’와 ‘십년 기약’을 한 것 같은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했을까? ‘공부한 지 삼 년 후에 육국(六國) 상인(相印: 재상의 도장)을 차’는 ‘소진’의 고사가 있고, 실제로 소과부터 대과 그리고 별시까지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던 율곡 이이(李珥) 같은 이도 있는 것을 보면, 민시영이 10년 안에 장원급제하는 이야기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돈 많은 양반도 어려운데 가난한 양인에게 쉬울 리 없으니, 천재가 아니고서야 민시영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월봉대사’의 등장이다. 그는 민시영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패글제를 민시영에게 알려주고, 임금의 꿈에 나타나 그 글제를 제시한다. 결국 평범한 민시영은 신이한 능력을 지닌 조력자의 도움으로 학업을 성취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 가빈(家貧)에 사현처(思賢妻)요 … 흔연히 받아들이면 이는 반도지폐(半途之廢)가 될 것이니 물리쳐 나중의 모습을 보리라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양처(良妻: 어진 아내) 유형에 속하는 인물이 많다. 현명한 아내가 어리석은 남편을 출세시키는 이야기가 많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민시영보다 더 부각되는 인물은 그의 삶을 변화시킨 아내다. 아내는 남편에게 과거 공부를 권유하는 ‘간곡한 요청’을 한다. 그런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임금은 ‘가빈(家貧: 가난한 집안)에 사현처(思賢妻: 현명한 아내를 생각함)’라 한다. 아내의 의지가 강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민시영이 찾아왔을 때의 반응이다. 그녀는 민시영이 10년도 안 돼 돌아왔을 때 ‘흔연히 받아들이면 이는 반도지폐(半途之廢: 일을 중간에서 그만 둠)가 될 것’이고, ‘물리쳐 나중의 모습을 보리라’고 생각한다. 민시영이 목표, 즉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이룰 때까지 아내는 마음을 굳건히 한 것이다. 결국 우부(愚夫: 어리석은 남자)인 민시영의 성공이 무엇보다 아내의 정성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 포인트
① 출세(出世)해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이상으로 삼았던 양반에게나, 양반으로 오르기를 소원하는 양인(良人)에게나 매우 중요했으므로, 과거(科擧)는 고전 소설에 빠지지 않는 소재임을 알아 두자.

② 소과 복시 합격자는 진사, 생원이라 불렸고, 하급 관원이 될 수 있었으며, 4대가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특권을 갖게 되었음을 알아 두자.

③ 전시를 곧바로 응시하는 것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을 알아 두자.

④ 평범한 인물의 비현실적인 과거 급제를 신이한 능력을 지닌 조력자를 등장시켜 가능케 함으로써 소설에 재미를 준다는 것을 알아 두자.

⑤ 고전 소설에 어리석은 남편을 출세시키는 양처(良妻)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알아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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