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총선 정국에 돌입하면서 여야가 앞다퉈 분배를 중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새 일본 총리가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간판정책으로 내건 것이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심각하지 않은 일본은 분배보다 성장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인의 연평균 수입은 30년째 제자리"라며 "소득격차를 축소하기 보다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 분배를 할 수 있는 파이를 키워야 할 때"라고 지난 16일 지적했다. 일본인이 직면한 문제는 분배가 아니라 "부유층을 포함한 국민 전체의 생활수준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이 신문은 주장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0년 일본인의 평균 연봉(구매력평가 기준)은 3만9000달러(약 4616만원)로 30년 전보다 4% 늘었다. 같은 기간 미국은 6만9000달러로 48% 증가했다. OECD 37개 회원국의 평균 연봉은 4만9000달러로 33% 늘었다.
일본의 평균 연봉은 1999년 처음 선진국(OECD) 평균 연봉을 밑돌기 시작한 지 20년만에 격차가 1만달러까지 벌어졌다. 2015년부터는 한국에 따라잡히면서 OECD 국가들 가운데 순위가 22위까지 떨어졌다.
반면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비해 빈부격차가 덜 심각한 나라로 분류된다. 일본의 소득 상위 1% 세대가 보유한 자산은 전체의 11%다. 부유층으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걷어 분배정책의 재원으로 쓰려는 미국은 상위 1%의 자산이 전체의 40%에 달한다. 영국도 20%를 넘는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연간 소득이 1000만엔(약 1억362만원)을 넘는 세대는 12%로 1996년(19%)보다 7%포인트 줄었다. 숫자가 1에 가까울수록 소득격차가 심각함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도 2009년 0.28을 넘었다가 2019년 0.275로 낮아졌다.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전 총리 내각의 대규모 경기부양책)의 부작용으로 일본의 빈부격차가 커졌다는 분석과 사뭇 다른 결과다.
일본 총무성은 "육아 세대의 고용환경이 개선되고 고령자의 소득이 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9년 취업자수는 10년전보다 약 400만명 늘었다. 특히 65세 이상 고령자와 여성의 고용이 증가했다.
역대 일본 정부와 일부 전문가들은 기업이 적극적으로 임금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기업이 일본 근로자의 임금을 인상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올 2분기 일본 상장사의 25%는 사상 최대 규모의 순익을 기록했다. 임금을 크게 올릴 환경이 조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용은 조금 다르다. 순익이 급증한 것은 대부분 해외 수요 덕분이어서다. 지난 20년간 일본 기업의 해외법인 매출은 2.2배 늘었다. 반면 일본시장의 매출은 7% 증가하는데 그쳤다. 일본 기업들이 일본 근로자들의 임금을 쉽게 올리지 못하는 이유다.
이 때문에 기업이 지속적으로 임금을 올리려면 일본 내수시장에서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필수라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나가하마 도시히로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수요부족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이 여전하기 때문에 성장 위주의 정책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다 야스유키 메이지대 부교수는 "소득 불평등이 아니라 저소득층에서 고소득층으로 계층이동이 어려운 격차의 고정화가 일본의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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