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흰 가루 모양으로 얼어붙은 미세 결정체다. 보통 10월 23일인 상강(霜降)에 내리지만 올해는 1주일이나 빨리 찾아왔다. 처음 내리는 묽은 서리를 ‘무서리’, 늦가을에 아주 되게 내리는 서리를 ‘된서리’라고 부른다. 예부터 ‘무서리 세 번에 된서리 온다’고 했으니, 날씨가 추워질수록 서리가 강해진다는 뜻이다.
서리가 내리면 뭇 수풀이 시든다. 나뭇잎도 엽록소를 잃고 적갈색으로 변한다. 당나라 시인 두목은 이런 변화를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붉다’고 표현했다. 서리는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농민에게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된서리’가 ‘타격을 크게 받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데 반해 서릿발은 밑에서 위로 솟는다. 땅속 수분이 얼면서 얼음조각이 흙을 밀어 올리므로 식물을 뿌리부터 상하게 한다. 그래서 서릿발의 피해가 더 크다.
서슬 퍼런 추궁이나 엄한 명령을 ‘추상(秋霜:가을 서리)같다’고 말한다. 서릿발 같다고도 한다. 무소불위의 칼날 앞에서는 모두가 서리 맞은 나뭇잎처럼 엎드린다. 권세가 강한 사람일수록 남에게 엄혹하고, 자신에게는 봄바람 같이 대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세태와 정치판을 보면 더 그런 것 같다.
《채근담(菜根譚)》에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남을 대할 때 봄바람 같이 부드럽게 하고, 자신을 대할 땐 가을 서리처럼 엄격하게 하라는 의미다. 진짜 위엄 있는 ‘제명(帝命: 제왕의 명령)’은 ‘추상’이 아니라 ‘춘풍’에서 나온다. 청와대도 ‘춘풍추상’ 글귀를 내걸었지만 구호와 실천의 간극은 넓어 보인다.
10월 한파와 일찍 내린 서리를 보면서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삶을 다시 생각한다. 쇠락의 계절 너머 희망의 씨앗은 어디쯤서 자라고 있을까. 윤동주 시인은 “이상이견빙지(履霜而堅氷至)-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라고 썼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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