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그의 분노는 작품 속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다. 그런데 어떤 분노일까. 시인은 위대한 전사의 분노를 ‘메니스(menis)’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이는 신들에게나 쓰던 표현으로, 신적인 ‘진노’를 의미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일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컸음을 드러낸다. 인간의 삶을 전복하는 분노의 힘을 이만큼 직설적으로 보여준 작품은 없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 전문가가 쓴 일리아스 해설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한 설명처럼 난해한 서양 고전을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자처한다.
일리아스는 서구 정신의 근원과 원형을 담은 작품으로 평가되지만, 현대 한국인이 번역을 통해 원전을 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피와 골수가 튀는 잔혹한 장면이 난무할 뿐만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서사시 형식에 이질감이 느껴지는 고대 작품의 독특한 표현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다루는 내용도 익히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의 전설과 크게 다르다. 일리아스에는 거대한 목마도, 발뒤꿈치에 화살을 맞아 죽는 아킬레우스의 모습도 나오지 않는다. 작품이 실제 다루는 날은 트로이 원정에 나선 지 9년이 지난 어느 해의 약 50일에 불과하다. 전투 장면은 총 4일 치뿐이다. 작품은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트로이 영웅 헥토르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작품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장벽에도 불구하고, 일리아스가 전하는 감흥은 강력하다. 인간이 삶에서 마주하는 분노, 갈등, 명성, 운명, 시련, 고통, 오만, 미망, 우정, 용기, 죽음 등을 직접 다루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이해는 현대인에게도 살아서 다가온다.
척박한 연구 환경에도 그간 한국 사회는 일리아스 원전 번역뿐 아니라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강대진 지음, 그린비)나 《‘일리아스’, 호메로스의 상상세계》(조대호 지음, 그린비) 같은 묵직한 일리아스 해설서들을 갖춰왔다. 이제 그 목록에 훌륭한 안내서 한 권이 추가됐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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